큰 손녀를 구박만 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며칠 새 바람이 서늘해졌다. 지난 겨울 할머니의 삼일장(三日葬)을 마치고 화장장으로 향하던 쌀쌀한 새벽이 떠오른다. 세 시간이나 눈을 붙였을까, 젊은 장례지도사의 목소리에 온 가족이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할머니의 영정과 시신은 거창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리무진 운구차에 실렸다. 할머니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무진에 타보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운구차를 뒤따르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앞 유리창엔 ‘근조(謹弔)’라는 LED 불빛이 반짝였다. 엄숙해 보이는 버스와 어울리지 않게 네온사인처럼 화려한 불빛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화장장으로 가는 길, 동 트기 전의 한강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 큰 손녀였다. 아버지는 육남매의 장남이었고 내겐 오빠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집안 장손의 여동생이었다. 할머니의 관심은 온통 장손에게 쏠려있었고, 나는 할머니의 애정 어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82년생 김지영 세대’라면 대개 엇비슷할 터다. 내가 학교에서 반장이 됐다거나 상을 받은 일을 할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면 할머니는 “넌 그런 걸 혼자만 하고 있냐! 오빠에게도 알려줘야지!” 하며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식사 때 밥을 천천히 먹어서 나 때문에 상을 못 물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나더러 그만 먹고 얼른 일어나라고 채근했다. 그렇게 먹으니 살이 찌는 것 아니겠냐며 가자미눈을 뜨고 흘겨보던 할머니 눈빛이 선하다. 어쩌면 명절에 남자들이 밥 먹는 상과 여자들이 밥 먹는 상이 따로 나뉘어 있는 게 볼썽사나워서 내가 일부러 남자상에 끼어 앉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남아선호사상만 강한 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할머니를 싫어하진 않았을 게다. 당시 시대상이 그러했으니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할머니는 전통적인 할머니상과는 다르게 사람을, 아니 본인의 혈육까지도 외모와 직업 따위로 평가하고는 호불호를 표현하는 분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도 할머니에겐 딴 나라 얘기였다. 전문직으로 일하는 아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했고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는 아들에겐 애정을 덜 줬다. (그러나 70대가 넘어서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에 근무하는 아들이었다.) 서울대에 들어간 사촌동생은 그 여자친구까지 집으로 불러 밥을 해먹였고, 지방대에 진학한 사촌동생은 명절에 할머니 댁에 오지 않아도 찾는 법이 없었다. 그런 기준은 큰 손녀인 내게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생존본능이었을까. 나는 할머니에게 사랑받는 법을 후천적으로 익혔다. 할머니 앞에선 실제보다 조금 허풍을 섞어 잘난 척을 해대곤 했다. 5등 한 걸 2등 했다고 공갈을 치거나, 내 모든 성취는 오빠에게 배운 것이라며 장손을 치켜세웠다. 할머니는 그제야 흡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러니 인간적으로 할머니를 좋아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날 것 같다.’ 이쯤 되면 꽤 오랜 기간 내가 이렇게 생각해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지난해 겨울 어느 추운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세가 많으셨고 암 합병증으로 투병 중이신 것을 알았기에 갑작스러운 부고는 아니었다. 경황이 없는 아들 며느리를 대신해 내가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장례식장을 예약했다. 장례 기간 동안 나는 꼭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 같았다. 찾아오신 조문객에 맞게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들을 모셔왔고, 그들의 신발을 정리하고 부족한 식사가 없는지 챙겼다. 난생 처음 본 분이라도 가시는 조문객에게는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렸다. 사촌동생들에게 할 일을 배분하는 일도 진두지휘했다. 그것은 내가 할머니를 가슴 깊이 사랑해서라기보다는 30년 넘게 몸에 배어버린 우리 집안에서의 내 역할이었고,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까지 ‘야무진 큰 손녀’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삼일장 중 이틀째, 입관(入棺)을 위해 장례지도사가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서열에 맞게 차례로 줄을 지어 장례식장 지하로 할머니를 뵈러 갔다. 줄 선 차례는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의 순서였을까. 발걸음은 경건하고 조용했다. 나는 몇 년 간 할머니를 본 일이 없었다. 아이 키우며 회사 다니느라 바쁘다는 핑계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 빳빳하고 정갈한 수의를 입고 얼굴에 화장까지 곱게 한 할머니는 내 기억보다 너무 자그마했다. 살아계실 땐 나와 할머니의 체구가 비슷했는데, 수의를 입은 할머니는 내 몸의 절반도 안 돼 보였다. 염을 하면서 너무 세게 묶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집구석의 마누라가 마음에 안 드니 우리 아들이 나가서 바람을 피우는 것 아니겠느냐”며 큰 며느리를 쥐 잡듯이 잡던 할머니의 생전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를 둘러싼 가족들 가운데 울음소리가 가장 크고 구슬픈 사람은 큰 며느리, 바로 우리 엄마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큰 사랑을 받은 아들들보다 큰 미움을 받은 며느리가 왜 그리 구슬프게 울었을까. 아이섀도에 볼터치까지 발갛게 한 할머니는 그저 온화해 보이기만 했다.
입관식을 진행하던 장례지도사는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으면 드리라고 가족들에게 시간을 줬다. 할머니의 얼굴을 직접 보고 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육남매가 울음을 삼키며 한 마디씩 했다. 차례는 손주들에게까지 돌아올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 그동안 며느리와 손녀들에게 왜 그러셨어요 라고 할까’란 생각을 잠시 했다. 내가 자라면서 받은 핍박과 차별을 풀 수 있는, 마지막 복수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쳐 지났다. 막상 입을 열자 다른 말이 나왔다. “할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하늘나라에서는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희한했다. 그런데 진심이었다. 염포로 묶여있는 할머니를 보니 ‘저 분도 참 쉽지 않은 세월, 애쓰고 사시느라 힘드셨겠다, 이제 편안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용서라든가 후회나 회한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자식에게마저도 순위를 매기고, 편애와 유산을 무기로 죽기 전까지도 자식들에게 효도 경쟁을 시킨 할머니에게 과연 남은 것은 무엇일까 하는 허무함이었다. 누구보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 앞에서 그동안 누가 누굴 미워했고 자시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할머니도 같은 여자인데, 정말 며느리와 손녀들을 여자라는 이유로 미워했을까. 이런들 저런들, 할머니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든 이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밤잠이었다. 조문객은 모두 다녀가고 그야말로 일가친척만이 남은, 발인 전날 밤이었다.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 손주, 손자며느리들은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각기 편한 자리를 찾아 몸을 뉘였다. 작은 아버지 가족들은 조문객을 대접하던 식당에, 우리 가족은 할머니 영정 바로 앞 방바닥에 함께 반듯이 누웠다. 가방을 베개 삼고 점퍼를 이불 삼아 눈을 꼭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댁에 다함께 모인 명절의 밤이 떠올랐다. 어린 손주들은 안방에서 추석 특선영화를 보다 불을 끄고 누워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얘기하다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었다. 바깥에선 어른들이 술상을 앞에 두고는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사이를 바지런히 오가는 건 할머니뿐이었다. 아들들 술상에 안주가 떨어질까, 손주들 자는데 찬바람이 들어올까 할머니는 이리저리 살피며 자는 손주들 다리 사이를 살금살금 디뎠다. 그 숱한 밤들과 같이,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모인 가족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영정 속에서 그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