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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선의 Sep 09. 2024

하이테크C와 여중생C

펜과 나와 <일인칭 가난>


  때는 귀밑 3cm 단발머리를 칼같이 유지하던 중학생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9년의 얘기다. 교실에서 여학생들의 빈부격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다이어리였다. 당시 다이어리는 중고등학생의 필수품이나 다름없었고 그때도 지금처럼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다. 좀 사는 집 아이들은 무크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앞뒤 판이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를 썼고, 넉넉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비닐 다이어리를 썼다. 어쩌다 잡지 부록으로 가죽 다이어리라도 나오는 달이 있으면 책이 깔리기 전에 미리 서점에 가서 예약을 해야만 잡지를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우리 반 여학생 중 절반 정도는 비닐 다이어리를 썼는데, 싸구려 비닐을 멋스러워 보이게 하려면 표지를 최대한 예쁘게 꾸며야 했다. 없는 예술적 감각을 쥐어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종이를 오려붙이고 끼웠다.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나 잡지 화보 스타일로 표지를 화려하게 꾸미면 그제야 가죽 다이어리 옆에 놓아도 꿇리지 않았다. 돈 많은 강남 미인들은 색조화장 없이 피부 결만 정돈해도 부티가 나고, 비강남 범인(凡人)들은 화려한 색조화장으로 자신을 꾸며도 어딘가 빈티가 나는 법칙은 서글프게도 25년 전 중딩의 다이어리에도 적용됐던 것 같다.


  다이어리에 한 자루씩 꽂고 다니는 펜으로도 부르주아는 티가 났다. 나와 친구들이 하나씩 사 모으던 건 일본 파이롯트(Pilot)사에서 나온 ‘하이테크씨(HI-TEC-C)’ 펜이었다. 갓 출시됐을 때만 해도 일본 수입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비싼 문구점에서나 볼 수 있던 하이테크씨는 당시 한 자루에 2,500원이었다. 통계청의 ‘화폐가치 계산기’에 검색해보니 1999년~2000년의 2,500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4,500원이다. 펜 하나에 4,500원이라니. 지금은 “돈지랄”이란 말이 절로 나오지만, 철없는 중학생들에겐 그 펜의 보유 여부가 잘 사는 집과 못 사는 집을 나누는 가늠자 같은 것이었다. 국산 동아연필 같은 브랜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이테크씨의 채도 낮은 인디핑크를 표현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색감과 품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들은 반지하 전셋집으로 귀가할지언정 부모님을 졸라 그 펜을 두어 자루라도 필통에 넣고 다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이테크씨 펜을 가지고 다니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집의 크기나 자가용의 종류와 관계없이. 중학교 교문을 나와서 어느 아파트 방향으로 걸어가는지와 무관하게. 펜을 색깔별로 더 가지고 싶은 중학생의 욕망은 점점 커졌다.


1999년, 하이테크C는 한 자루에 2,500원이었다. 지금 물가로 치면 4,500원인 셈이다. 중학생이 이 무슨 돈지랄이란 말인가. (사진 출처 : 문구류 전문 쇼핑몰 펜팬클럽)


  나 은영 지민, 우리 셋은 모두 평범한 샐러리맨 집안의 딸이었다. 끼니를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캘빈클라인이나 게스, 나이키 제품으로 온 몸을 도배하고 다니는 반 친구들과는 알게 모르게 벽이 있었다. 우리는 브렌따노, 메이폴, 엘레쎄, 인터크루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었다. 그건 게스를 입는 친구들보다 조금 가난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우리 셋에게 하이테크씨 펜은 겨우 두어 자루 정도밖에 없어 늘 목마른 것이었다. 사춘기 여중생이 으레 그렇듯 셋의 상상력과 대범함은 하늘을 찔렀다. 두툼한 떡볶이 코트가 유행하던 어느 겨울날, 셋은 말 그대로 작당모의를 했다. 이 요망한 중학생들의 계획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비싼 하이테크씨 펜을 몇 자루 훔치는 것이었다. 마침 떡볶이 코트는 품이 크고 소매가 길고 주머니도 큼지막해 나쁜 짓을 하기에(?) 적당했다. 한 명이 사장님의 관심을 끄는 사이 다른 두 명이 펜을 자연스럽게 소매에 넣어 주머니로 옮겨 담을 요량이었다. 성공만 하면 눈 깜짝할 사이 우리에게는 부르주아 펜 몇 자루가 더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네 살은 열네 살이었다. 사장님 눈에는 우리의 빤한 계획이 모두 보였던 모양이다. 은영이 의미 없는 질문으로 그의 주의를 끌던 사이 어설프게 뚝딱거리며 펜을 집어넣던 지민이 먼저 잡히고 말았다. 나는 심상찮은 기류에 놀라 잽싸게 문 밖으로 도망쳤다가 이내 가게로 돌아왔다. 지민과 은영 모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얼굴로 카운터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 이 앞 중학교 학생들이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벌써부터 도둑질이 웬 말이야, 도둑질이… 너네 이거 처음 아니지? 안 되겠다, 경찰에 넘겨야겠다. 부모님 전화번호 대! 얼른 전화해!” 좁은 가게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사장님의 불호령에 우리 셋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엉엉 울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저희 정말 처음이에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학교에만은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가 감방에 갇힌다, 마침 우리 학교 뒤엔 범죄자들이 우글우글한 구치소가 있으니 거기로 보내지겠지, 몇 년이 지나 나오더라도 도둑년으로 낙인이 찍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못 간다, 이 모든 사실은 당연히 동네방네 알려진다, 내 인생은 완전히 종쳤다……. 머릿속에서 14세가 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상상이 휘몰아쳤다. 내가 왜 그깟 일제 펜을 갖고 싶어 해가지고. 안 걸릴 거라 자신하고 손을 뻗은 미련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 인생을 나 스스로 망쳐버린 것 같아 두렵고 또 두려웠다. 한 시간 가까이 울며 싹싹 비는 우리를 보고 처음엔 완강하던 사장님도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던 모양이다. 

“그래, 이번 한 번이라는 너희 말을 믿고 내가 이번만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게. 부모님께 전화하는 게 그렇게 무서우면 언니나 오빠도 괜찮으니 너희를 데려갈 만한 윗사람한테 전화드려.” 오마이갓. ‘내 인생의 흑역사 베스트 3’ 안에 기필코 포함될, 이 쪽팔리기 그지없는 일을 부모님에게 숨길 수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천사 같은 사장님이 존재할 수가!


  나는 오빠에게 전화했다. 크고 작은 다툼이 잦던 부모님 때문에, 세 살 터울의 오빠와 훨씬 더 친하던 시절이었다. 내 주변엔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남매들이 많았기에 오빠와 사이좋은 나는 별종 취급을 받았다.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아서’라고 말할 수는 없어 ‘오빠가 정말 착하다’고 늘 대강 둘러댔다. 뚜루루- 뚜루루-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오빠 목소리를 들으니 미안하고 창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울음을 삼키다 겨우 입을 뗐다. “오빠, 나 여기 학교 앞 문구점인데… 지금 바로 와줄 수 있어? 내가 있잖아… 여기에서 펜을 훔치다가…….” 30분쯤 지났을까. 고등학생이던 오빠가 헐레벌떡 문구점으로 들어섰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가다 말고 달려왔을 것이다. 가게 사장님께 죄송하다면서 오빠가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이 나는 한 발짝 뒤에 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땅만 쳐다봤다. 


  “딸랑!” 구치소처럼 느껴지던 그 좁은 가게를 오빠와 함께 나왔다. 하늘은 맑고 높았고 바깥 공기는 쾌청했다.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꼭 출소하는 기분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나는 부끄러움과 미안함과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치심을 온 몸에 처덕처덕 바른 채 다섯 발자국쯤 뒤에서 오빠를 따라 걸었다. 큰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려 신호를 기다리며 잠자코 서있는데 오빠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사줄 테니까.” 오빠는 나를 꾸짖지도 조롱하지도 비아냥대지도 않았다.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한 말투였다. 이미 울 만큼 울어 진이 빠져버리고 두려움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동생을 조금 애처롭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더 이상 울 기운도 없었지만 오빠 말을 듣자 울음이 또 터져 나왔다.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힘차게 끄덕였다. 눈앞이 뿌예지는 바람에 다섯 발자국 떨어져 걷던 오빠 발과 내 발의 거리가 차츰 좁혀졌다.


  그 뒤로 나는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일이 없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가끔 그 생각이 나면 수많은 ‘만약에’가 떠오른다. 만약 내가 그때 그 가게 사장님에게 걸려 호되게 혼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장님이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난 어떤 아이로 자랐을까. 나를 데리러 온 게 오빠가 아니라 엄마였다면 어땠을까. 도둑질한 중1 여동생을 데리러, 학원도 빼먹고 헐레벌떡 달려온 오빠가 만약 나를 쥐 잡듯이 잡았다면 난 어떻게 반응했을까. 만약 집에 오자마자 오빠가 부모님께 그대로 일러바쳤다면 어땠을까. 놀랍게도 오빠는 그때 그 일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 기함할 만한 에피소드를 아직도 모르신다. 수많은 ‘만약에’를 뒤로 하고 모든 고마운 순간들이 만나 나는 절대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어떤 경험은 소설보다 소설 같다. 내겐 안온 작가의 책 <일인칭 가난>이 그랬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싶었다. 여러번 우느라 책장을 자주 덮었다.


에필로그 >

  어떤 경험은 소설보다 소설 같다. 친구들의 이름을 제외하곤 백퍼센트 사실인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소설처럼 읽힐 것이다. 20년 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온 20대 작가 안온의 책 <일인칭 가난>(지은이 안온, 출판사 마티, 2023년)이 내겐 그랬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의 생생하고 차가운 경험들을 눈앞에 두니 자꾸만 내 어릴 적이 떠올랐다. 작가의 뼈아픈 경험들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배가 부르디 부른, 웃기고 자빠지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그때의 기억이 사무치게 쓰고 싶어졌다. 내가 제일 힘든 경험을 했어야만, 내가 제일 고된 시련을 겪었어야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제도권 밖 가난이 어떠한지 잘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1인분의 가난 이야기를 쓴 작가처럼 말이다. 그가 책의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문장이 오래 맴돈다. ‘내가 늘 제일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부와 빈곤이 수직적 관계이듯, 어떤 빈곤과 그보다 더한 빈곤도 그러하다.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 빈곤의 순위는 뒤바뀐다.’ 

가게 사장님의 넓은 아량 덕분에 소년범 신세를 면한 열네 살 여중생은 이제, 기초생활수급 어린이를 도우려면 어떤 방법이 효과적일지 고민하는 불혹의 엄마가 되었다. 기왕이면 물건을 훔쳤던 어린이를 도와주면 좋겠다. 아무래도 훔쳐본 경험이 있기에 훔치는 어린이의 마음을 영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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