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제대로 쉬는 것이 지상 최대 과제이던 시절
“숨을 크게 쉬어 봐요. 당신의 가슴 양쪽이 저리게, 조금은 아파올 때까지. 숨을 더 뱉어 봐요. 당신의 안에 남은 게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가수 이하이의 노래 ‘한숨’의 도입부 가사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그 다음이다. “숨이 벅차올라도 괜찮아요. 아무도 그댈 탓하진 않아. 가끔은 실수해도 돼. 누구든 그랬으니까. 괜찮다는 말, 말 뿐인 위로지만.”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눈이 뜨거워지는 나의 ‘눈물버튼’ 같은 곡이다. 내게도 한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이 가장 큰 목표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일이다. 아이가 갓 네 살이 됐을 때, 그러니까 대소변을 겨우 가리고 의사 표현을 잘 할 무렵 남편은 바다와 맞닿은 멀고 먼 경상도 끄트머리로 발령이 났다. 주말부부가 된 것이다. 양가 부모님께 육아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일이 잦았기에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로 집을 옮겼다. 오후 4시에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하원 도우미 이모님을 고용했지만, 오전 등원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더 자겠다고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깨워 아침을 대강 먹이고 옷을 입혀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일. 글로는 오직 한 줄에 불과한 이 일이 나는 점점 버거워졌다. 이 간단해 보이는 일이 매일 아침 아이와의 사투로 이어져서였다.
아이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는 걸 갈수록 힘들어 했고 아침도 먹지 않으려 했으며 옷도 입지 않았다. 옷을 안 입겠다고 도망을 다니는 바람에 나는 아이에게 화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웃으며 살살 비위를 맞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라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지방 출장이 잡혀있는 어느 날엔 KTX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층 더 조급해졌다. 내 간절한 마음이 티가 났는지 아이도 하필이면 그날따라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고 커튼 뒤, 에어컨 뒤, 식탁 아래에 숨어 나오질 않았다. 결국 그날은 밥도 못 먹인 내복 바람의 아이를 잠바로 감싸 안은 채 급하게 집을 나섰다. 아이는 내려달라고 울면서 발을 동동 굴렀고, 나는 어린이집 현관에서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선생님께 아이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급히 서울역으로 향했다.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그때 아이를 팽개치듯 내려놓은 팔의 감각이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있다. 죄스러운 마음이 팔에까지 박제된 모양이다.
상황이 이러니 출근하는 일 자체가 너무나 고역이었다. 저 실랑이를 하느라 회사에 지각하는 경우가 잦았다. 출근시각을 3분정도 아슬아슬하게 혹은 10분 정도 훌쩍 넘긴 때, 산발한 머리로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자리에 앉으면 눈물이 차올라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나는 항상 이렇게 미안해야 하지, 왜 아무도 나를 안 도와주지’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철없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연로하신 데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 육아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죄 없는 양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커져갔다. 양가에서 번갈아가며 아이를 봐주시는 친구들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힘든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출장이든 뭐든 그다지 배려해주지 않는 직장 상사들이 괜시리 야속했다. 그들은 회사 일 하면서 아이를 직접 키워보지 않은, 워킹맘으로 살아보지 않은, 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사회생활에만 올인한 중년 남성이라 나의 이 마음을 공감할 수 없다고 재단하고 혼자 날카롭게 뿔을 세웠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저녁 7시 30분까지는 반드시 집에 가야 했기 때문에 회사 일을 내 욕심만큼 할 수 없는 상황도 워커홀릭인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짊어진 짐들에 더 무거운 바윗덩어리가 올라간 건 아이에게 희귀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남편이 없는 평일에 나는 연차를 쓰고 아이와 대학병원을 오가며 각종 검사를 받았고, 듣기만 해도 겁이 나는 이야기들을 혼자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러면서 아이 앞에서는 짐짓 의연한 척 태연한 척하며 웃었기에 내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힘들다는 토로를 친한 친구들만 볼 수 있는 개인 SNS에 올리자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특히 내 사정을 깊이 아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은 내게 조심스럽게 상담을 권유했다. 한 친구는 자신이 몇 달 간 상담을 받아본 분이라며 선생님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 아침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다. 마음이 유독 힘든 원인에 대해 찾아가는 과정은 지난했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 그때마다의 내 마음상태를 모두 짚어봐야 했기에 가끔은 지겹기도 했다. 그래도 몇 달을 꾸준히 다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몸에 근육을 만들러 PT를 받으러 가듯 내 마음근육을 단단하게 하려 상담을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길이 설렜다. 1시간 30분 동안 눈물 콧물 쏙 빼며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은 속이 정말 후련했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마음이 조금씩 나아지자 해결책이 보이고 행동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오전시간에도 등원 도우미를 고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차로 30분 거리에 꽤 멀리 사시는 하원 도우미 이모님이 등하원을 모두 전담해주는 행운이 찾아왔다. 지출은 한 달에 수십만원 늘었지만, 그로 인해 생긴 내 심적 여유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좀 살겠다 싶던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려 부서원 모두 회의실 탁자에 빙 둘러앉았다. 나름대로 기똥차게 준비한 회의 아이템을 내놓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던 차였다. 회의를 주재하는 부장님을 쳐다보는데, 부장님 뒤로 흰 벽에 까맣고 동그란 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작았다. 꼭 쿠사마 야요이 작가의 호박 작품에 새겨진 점들 같았다. 그러면서 왼쪽 가슴 아래, 그러니까 심전도 검사를 할 때 차가운 고무캡을 붙이는 그 선을 따라 강한 통증이 일었다. 누군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윗가슴이 답답했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식은땀이 나면서 ‘여기에 더 이상 못 앉아있겠다, 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고 말을 겨우 뱉어냈다. “부장님, 죄송한데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휴게실에서 좀 쉬고 올게요.”(이 와중에도 죄송하다고 하는 이 뼛속까지 직장인이란...)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동료들이 휴게실에 가는 나를 부축해 줬다. 휴게실에서 다리를 뻗고 누운 채 옷에 있는 모든 단추와 지퍼를 풀고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숨을 쉬다보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10분 남짓이었을까, 잠에서 깨니 그제야 좀 괜찮아졌다. 이게 뭐지, 심장 문제인가. 혹시 말로만 듣던 부정맥인가. 아니면 협심증이나 뇌경색 같은 건가. 퇴근 무렵이었는데, 집에 가서 아이와 둘만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무서워서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 앞 가정의학과 의원을 찾아가니 대학병원 진료 의뢰서를 써줬다.
다음날 부리나케 잡은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외래진료에서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등 각종 검사를 마치고는 인자해 보이는 교수님 앞에 앉았다.
교수님 : “검사 결과를 보니까 다 정상이네요.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셨어요?”
나 : “아, 업무 스트레스가 있긴 한데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니고요. 제가 주말부부라 평일에는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거든요. 쉴 틈이 전혀 없는 게 좀 힘들어서 몇 달 동안 심리 상담도 받았고요.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이야기를 들은 교수님은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교수님 : “네, 그러시군요. 공황장애입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부정부터 했다.
나 : “네에??? 공황장애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선생님? 저는 그렇게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 발로 찾아가서 심리상담도 받았고요. 이제 객관적인, 물리적인 상황이 괜찮아졌어요. 그렇게 공황장애가 올 만큼 힘이 들 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교수님 : “환자 분들이 다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래 공황발작이라는 게요, 극도로 긴장을 하고 있다가 나름대로 뭔가 해결책이 생겨서 잠깐 긴장이 풀어지면 더 잘 옵니다. 말씀하신 증상이 아주 전형적인 공황발작 증상입니다. 정신력과는 전혀 무관하고요. 이겨내고 말고도 본인 의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남한테는 안 매운 음식도 나한테는 매울 수 있죠? 마찬가지로 힘든 기준을 남들 시각으로 보면 안돼요. 앞으로 증상이 더 자주 나타날 수 있으니 약을 드릴게요. 그리고 호흡이 아주 중요한데 심호흡을 할 수 있는 운동, 음… 요가 같은 걸 해보시면 어떨까요?”
어릴 적 국어시간에 배우는 소설의 구성단계에서 왜 위기 뒤에 절정을 넣는지 알 것 같았다. 위기 후에 갈등이 해소됐겠거니 방심하던 차에 짜잔! 하고 깜짝 선물 같은 절정을 넣는 것이다.
병원을 나서는 길에 믿기지가 않아서 헛웃음이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공황장애라니. 약을 먹어야 한다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졌고, 스트레스 요인이 될 만한 일들을 즉시 없애려 노력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이른 새벽 생방송으로 전화연결을 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에서도 하차했고, 회의 때 내 모습을 목격한 같은 팀 직원들에게는 상태가 이러저러하다고 약간의 양해를 구했다. 가장 가까운 요가원을 찾아 요가수업을 등록하고 일주일에 세 번,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는 일은 당시 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일을 하다 증상이 나타날 것 같은 전조증상이 오면 가슴에 양 손을 겹쳐 얹고 손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일 만큼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된 몸이 조금이나마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기도가 조여 오는 것처럼 목이 답답한 느낌이 들면 약을 먹는 대신 꼬마곰 젤리 한 봉을 부지런히 씹어 먹었다. 한 봉으로 안 되면 두 봉, 세 봉을 먹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약 먹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약을 먹으면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약에 기댈 것만 같아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이제 내겐 더 이상 공황발작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사이 남편이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았고 덕분에 내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린 아이와 둘만 있다는 불안감에 자기 전 현관문을 2중 3중으로 잠그고도 창문 걸쇠까지 모두 걸어잠그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다. 아이도 제법 커서 이젠 되지도 않는 떼를 쓰거나 옷을 안 입겠다고 도망을 다니진 않는다. 1년 간 꾸준히 했던 요가도 정신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상담가 선생님은 상담이 끝날 무렵 “제게 찾아오는 내담자 분 중 가장 건강한 정신을 가지셨다”고 말해주셨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됐다.) 언제 어디서 발작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부적처럼 챙겨 다니던 비상약도 완전히 버렸다.
이제 나는 공황장애 환자를 정신력이 약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정말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인데 왜 공황발작이 일어나는지 이상하게 여기거나 딱하게 볼 필요도 없다. 누구든 언제든 아플 수 있고 제때 제대로 치료받으면 그만이다. 이 질환으로 <무한도전>에서 하차했던 정형돈이 그랬던가. 공황장애는 착한 사람이 걸리는 병이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하고 순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떠안으려다 그만 몸에 탈이 나버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몸소 경험하고 나니 더 깊은 이해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행복이라는 게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는 것, 호흡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