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된 걸까.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를 일하게 만든 아이들이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2021년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긴 수상소감의 한 대목이다. 영화관에서 펑펑 울어가며 <미나리>를 본 당시의 나는 이 수상소감에도 한동안 눈물이 차올랐다. 당시 다섯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둘 다 잘해보려 애쓰는 게 하루하루 고되던 차였다. ‘이렇게 다 잡으려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결국 내겐 빈손만 남는 것 아닐까. 육아든 일이든 뭐라도 하나를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매일 고민하던 그 마음을 70대 중반의 배우 윤여정이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10년 가까이 기자로 열심히 일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 다시 새벽별을 보고 퇴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몸담은 분야에서 최대한 잘 해내고 싶어서였다. 퇴직을 앞둔 50대 선배가 여유롭게 핸드밀로 커피 원두를 갈며 “내야 집에 가도 할 게 없어 이래 있다 치고, 니는 우얄라꼬 이래 퇴근을 안 하노.”라며 웃을 정도였다. 그러다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꿈같은 시간을 보낸 뒤 아이 돌잔치를 치르고 복직했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온 내겐 매일이 중노동이자 죄책감의 연속이었다. 눈을 비비는 아이와 씨름해가며 겨우겨우 옷을 입혀 어린이집에 내맡기듯 데려다주고 헐레벌떡 회사에 나왔다. 중고참씩이나 돼서 출근시각의 마지노선이 다 되어 오는 것을 아니꼬워 하는 이들이 나를 흘겨봤다. 업무시간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지만, 아침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저녁에는 베이비시터 이모님과 교대를 해야 하는 탓에 먼 지역으로의 출장이나 늦은 회식자리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회식을 하다가도 저녁 7시 30분이 되면 알람을 맞춰놓고 신데렐라처럼 “이제 애 보러 가야 해서요…”라며 자리를 떴다. 아이에게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 하는 건 물론이었다. 아침에 일찍 나가고 저녁에 늦게 오니 하루 세 끼 중 내가 먹이는 끼니는 한 끼도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배꼽인사를 하며 하원하는 모습도, 작은 욕조에서 물장구 치며 신나게 목욕하는 모습도 모두 내가 아닌 시터 이모님이 지켜봤다. 아이는 늦게 온 엄마와 놀고 싶어 밤 12시까지 깨 있었다.
엄마의 손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작은 아이는 내게 큰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회사 안에서 기자직군이 아닌 사무직군으로 지원해 업무영역을 옮긴 것이다. 오랜 기간 나를 알던 취재원들은 인사발령 소식을 듣고 걱정스레 전화를 걸어왔다. 뭔가 큰 잘못을 해 좌천성 인사를 당한 것이라 짐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무직보다 기자직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병치레를 자주 하는 아이가 아프면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그로 인해 갑작스러운 휴가를 쓰는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사무실에서 일하는 나인투식스 직군을 택했다. 직군을 바꾸는 게 얼마나 낯선 일이냐 하면 아예 그냥 다른 회사에 신입직원으로 입사한 것 같았다. 컴퓨터를 켜면 쓰는 프로그램이 ‘기사 입력기’에서 ‘엑셀’로 바뀌었지만, 엑셀이라곤 고등학교 기술시간에 배운 ‘썸(SUM)’밖에 기억나지 않는 나는 갓 들어온 신입에게 엑셀을 배웠다. 숫자 세는 일에도 익숙지 않아 100만원이 넘어가면 맨 뒷자리부터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속으로 ‘일십백천만십만백만...’하고 세야 했다.
거래처와의 회식이 있는 날이면 예비 탄환처럼 헛개 컨디션 두 병을 양쪽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약으로 만든 간을 보호하는 알약까지 입에 털어 넣고 열심히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거의 파해 가는 게 보이면 카카오T를 열어 ‘갑님’의 택시를 잡아드리고 문을 닫아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인사하는 게 일상이 됐다. 모든 자리가 끝난 뒤에야 단단히 붙잡았던 정신줄을 잠시 느슨하게 놓았다. 비틀비틀 갈지(之)자로 걸어 집으로 향할 때면 늘 속이 쓰렸다. 아이를 낳고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된 걸까.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일까.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들이 울컥 올라왔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처럼, 훨훨 날아다니며 제 인생을 사는 멋진 미혼 후배들처럼, 나만 할 수 있는 전문분야를 만들고 싶었다. 30대 후반쯤 되면 나만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럴싸한 출입처에 다니며 특종 기사를 쓰면서 어깨에 힘도 좀 주고, 기자협회에서 주는 상 같은 것도 좀 받고 싶었다. 현실은 헛개 컨디션을 물처럼 마시며 비틀비틀 집에 가다 전봇대에 머리나 박는, 한심한 나였다.
회사에서의 내 커리어 패스는 갈피를 잃었지만, 가만히 헤아려보면 출산 후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변화는 호주머니를 뒤집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나는 보다 온화하고 너그러워졌다. 머리로만 이해하던 이들을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유모차를 몇 년 끌어보니 세상에 얼마나 턱이 많은지,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하여 휠체어를 타거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게 됐다. 전에는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그저 ‘비양심 월급 루팡’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저들도 집에 가면 좋은 아버지(어머니)일 수 있지, 사람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는데 여기서도 저기서도 모든 일을 잘 해낼 순 없겠지’라며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모두 내 아이들 같아졌다. 너무 빨리 달려가는 아이를 보면 그러다 넘어지거나 부딪치지 않을까 눈길을 주게 됐고, 등하굣길에 갑자기 비를 만난 초등학생에겐 가는 곳까지 우산을 씌워주는 꽤 근사한 어른이 됐다. 외출 중에 갑작스레 대변을 본 아기 때문에 공원 화장실에서 난감해 하는 아기 엄마에겐 가방에 늘 챙겨다니는 물티슈를 넉넉히 건네는 여유가 생겼다. 내게 아이가 없었다면 난 그를 보며 ‘왜 사람도 많은 여기에서 세면대를 두 칸이나 차지하고 있담’하고 짜증을 냈을지 모른다. 윗집에서 쿵쿵 뛰는 소리도 윗집 아이를 상상하면 ‘신나는 일이 있나보군’ 하고 조금은 미소 지을 수 있게 됐다. 안 그래도 MBTI 가운데 판단기능이 감정형, F(Feeling)인 나의 공감능력은 아이를 키우며 최대치를 찍었다. 뉴스의 사건사고 소식은 마음이 아파 못 볼 지경이다. 특히 이태원 참사처럼 생때같은 아이들이 유명을 달리한 사고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처럼 그저 일상을 살았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가 된 사건들은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해 성탄절 새벽 서울 도봉구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안고 뛰어내려, 아이는 구하고 본인은 숨진 30대 아버지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남들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나를 보는 자세에도 변화가 생겼다. 더 좋은, 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성실하고 온화하며 영민하고 여러 방면에서 여유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언제든 손을 잡아주고 함께 머리를 맞댈 수 있는 보호자이길 바라서다. 그래서일까. 내게 꼭 ‘인생 2회차’의 기회가 주어진 기분이다. 어린 시절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나를 다시 세팅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버스에서 “엄마, 장애인이 뭐야? 노약자는 또 뭐구?” 하고 소곤소곤 묻는 아이의 질문에 최선의 답이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한다. 그렇게 단어의 뜻과 사회의 질서, 규칙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도 내 안의 개념들을 다시 정립하고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끊임없이 스스로 되묻고 있다.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상을 거머쥔 지 3년, 그는 얼마 전 반려견을 소재로 한 잔잔한 영화 <도그데이즈>를 촬영하고 홍보에 한창이었다. 나영석PD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윤여정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시나리오 좋고, 역할 좋고, 감독 좋고. 그런 건 나한테 안 와.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가 어디 있어. 하나만 봐야 하는 거야.”
노배우의 관록에 오늘도 무릎을 친다. 다 좋을 순 없다. ‘적당한 시기에 아기천사가 찾아와서 나를 세상 모성애 깊은 엄마로 짠하고 변신시키고, 나는 일과 육아를 모두 우아하고 균형감 있게 해내며 멋진 워킹맘으로 우뚝 선다’는 것은 완전히 허상이다. 모르긴 몰라도 윤여정 또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두 아들을 키우진 않았을 것이다. 일도 육아도 잘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버둥대고 허둥대다 닥치는 대로 어떤 역할이든 맡는 대로 해냈을 것이다. 아이들 잘 키워보려 열심히 일했던 현장에서 그는 누구보다 큰 명예를 얻었다.
대배우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상이 아닌 현실 속 나는 육아도 일도 모두 ‘야매’다. 하루에 “엄마 여기 좀 봐봐!”를 수백 번쯤 해대며 자신을 봐달라는 아이에게 그만 좀 부르라며 버럭 짜증도 내고, 양치질은 가끔 건너뛰고 재우는 날도 있고, 몸이 너무 피곤할 땐 유튜브 영상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전에는 항상 꼭 껴안고 사랑한다고, 내일 더 재미있게 놀자고 말하며 함께 잠을 청한다. 그동안 퇴근 후 TV에 멍하니 빠져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같아 최근 이사하면서는 과감히 TV도 없앴다. (덕분에 <나는 솔로> 본방송을 못 봐서 삶에 큰 타격이 있지만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엄청난 모성애라거나 확고한 육아관 같은 건 없다. 그저 아이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고 싶다. 그리고 훗날 “너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했다”며 자식 탓 하지 않도록, 다음 인사철에는 다시 기자직으로 직군 변경을 지원하려 한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잡기란 너무나 어렵고, 다 잘 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일흔여섯에 오스카상을 거머쥔 그가, 그래도 된다고 내게 웃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