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차인표와 나
언젠가 배우 차인표가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나와 이런 얘기를 했다. “제가 데뷔한 지 20년이 됐는데요, 연기로는 칭찬을 못 받았습니다. 영화제에서 상 받은 적도, 초청받은 적도 거의 없어요. 돌아보면 제 연기는 2류예요. 최민식 선배나 송강호씨 같은 명품연기는 보이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세상은요, 1류만 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최민식, 송강호 연기만 보면 질리지 않겠어요? 가끔 가다 발연기도 한 번씩 봐야죠.”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기분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평소 ‘2류’란 생각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다. 그런데 이제 그 뒤에 설명이 좀 붙는다. 조중동이나 한겨레 경향 같은 메이저 종합일간지 기자는 아니고, TV를 틀면 나오는 지상파 3사나 종편채널의 기자도 아니다. 글도 멋들어지고 어딘가 세련됐을 법한 잡지기자도 아니다. 나는 전문지, 그 중에서도 농업 전문지의 기자다. 그러니까 기자 지망생들의 희망순위와 사회의 서열에 따르자면 나는 ‘2류 기자’인 셈이다. 수능 커트라인 점수에 따라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처럼 대학 순위가 매겨지듯, 기업이 시가총액과 매출규모에 따라 ‘삼성 LG SK 현대’ 같은 서열이 있듯, 언론사도 알게 모르게 나름의 분류가 있다. 그래서 내 소개가 필요할 때면 “작은 언론사에서 일한다”고 미리 밑밥을 깐다. 내가 다니는 회사 이름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도록.
대학 시절엔 나도 메이저 언론사 기자를 꿈꿨다. 4학년 때 준비 없이 쳐본 시험에서 두 지상파 방송사의 면접까지 단번에 올라가면서 그 이듬해에 꼭 합격할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신문사에서 인턴기자도 했고, 기사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고, 이미 마음은 기자로 살고 있는데 나 아니면 누가 되겠어.’ 콧대가 꺾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연습 삼아 보겠다면서 호기롭게 친 필기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했다. 스터디 모임에는 나보다 글 잘 쓰고 말도 잘 하고 논리적이며 생각이 깊고 기발한데다 예쁘기까지 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난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 ‘열심’도 입사를 해야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첫 도전에 합숙면접까지 허락해준 한 방송사는 그 이듬해, 나를 서류전형에서부터 떨어뜨렸다. 가장 가고 싶은 꿈의 언론사였기에 충격은 상당했다. 난 분명 작년보다 자기소개서도 잘 썼고, 토익점수도 올랐고, 입상 경력도 생겼는데 대체 왜지? 뭐 때문이지? 학벌이 달렸나? 증명사진이 너무 못 생기게 나왔나? 그동안 마음 한 편을 차지하던 콤플렉스 덩어리 불씨들이 방송사의 거절 소식에 기름을 부은 듯 활활 타올랐다. ‘너 같은 B급은 이곳을 넘볼 수 없다’는 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스터디 모임을 마치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갓 실연한 사람처럼 온 얼굴이 젖을 정도로 울었다. 설상가상 그 해엔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불어 닥쳐 기업들은 채용을 대폭 줄였고 신입사원을 뽑는 언론사도 몇 없었다. (기자들이란 원래 상황이 안 좋았다는 말로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이다.) 그러다 덜컥, 농업 전문지에 붙어버렸다.
농업 전문지라고 해서 일이 고되지 않을 것이라거나 독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한다면 완전히 오산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사한 사회초년생에게 정식이니 시비니 하는 단어는 완전히 외계어 같았다. 정식하면 방정식이, 시비하면 길거리 싸움이 생각나던,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것이 옮겨심기와 거름주기의 한자식 표현이라는 것을 공부해야 했다. 새내기 기자 시절 내 목표는 단 한 가지, 내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는 기사에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만 성공해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농업 용어와 각종 농법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달달 외웠다. 싱그러운 1년차 어느 날엔 기사에 함께 들어가는 표 오른쪽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표시된 단위를 틀려서 독자에게 꾸지람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모판에 볍씨 놓는 단위가 틀렸어! 립(粒·낟알)이 아니고 그램(g)이야! 난 프로니까 괜찮지만, 초보농부가 기사만 보고 농사짓다간 다 망하겠어!” 멀디 먼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에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다음부터 나는 단위나 숫자를 유난히 더 꼼꼼히 확인했다.
시골 할매 할배들의 지청구도 극복해야 할 산이었다. 내가 취재하는 이들은 주로 농사를 기가 막히게 잘 짓거나 아니면 자연재해 같은 사고로 작물에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말끝마다 “기자라면서 그것도 모르냐”를 입에 달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농사도사 할배에게선 처음 들어보는 용어와 농법이 튀어나와 “잠시만요. 이 사과나무의 수형(樹形·나무 모양)이 세장방추형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하고 말을 끊어가며 자세히 알아봐야 했고, 태풍피해를 입은 할매는 할매대로 화가 많아 처음엔 찬찬히 설명하다가도 내가 조금이라도 갸웃하면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처음엔 나도 ‘모르니까 물어보지!’라며 속에서 화가 훅 올라오기도 했지만, 갈수록 “제가 농업을 전공한 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니까요, 손주한테 알려준다 생각하시고 말씀 좀 해주세요” 라며 넉살좋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을 십 년쯤 하자 이제 20대 젊은이보다도 어르신과의 대화가 편하고, 누구를 만나도 살갑게 말을 붙이고 능청스럽게 답하는 기술이 생겼다. 모두 할매 할배들의 타박 덕분이다.
이렇게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점에서 나는 기자답지 않은 기자였다. 기자라고 하면 대개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대는 직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나는 10을 알아도 1밖에 모른다며 더 설명해 달라 취재원을 한껏 띄워주고 받아 적는 상냥한 기자였다. 기자란 직업군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특종을 잘 해내는 사람,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잘 분석하는 사람, 유려한 필력을 자랑하는 사람….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내겐 정보나 문건을 빼내 특종을 하는 대담함이나 명예욕이 없었고,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글을 써내는 필력도 없었다. 하지만 취재만큼은 누구보다도 풍부하게 했다. 취재원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멍석을 깔아주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듣는 리액션 습관 덕분이었다. 종자회사에서 잘못된 씨앗을 받아 한 해 농사를 망쳤다는 얘기도, 산골짜기 농가 맛집의 맛내기 비법도 그래서 기사로 옮길 수 있었다. 미세먼지가 전국민적 이슈이던 때엔 농민들이 미세먼지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기사를 여러 차례 써서 법을 바꾸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12년쯤 하자 나는 비로소 내 일터와 일이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메이저 언론사 기자들이 청와대와 국회에서 높은 직위의 사람들에게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댈 때 나는 농촌의 흙바닥을 돌며 할매 할배들 앞에서 수첩을 꺼냈다. 엉덩이에 꿀벌처럼 작업용 방석을 매달고 함께 마늘 양파를 뽑으면서 수확작업이 얼마나 고된지 느꼈고, 사과꽃과 배꽃에 인공수분을 하는 철엔 일손이 없어 근처 시군에서 60대 ‘젊은 엄마’들이 총출동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보고 듣고 기록했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려 비닐하우스 안 채소들이 전부 녹아내렸을 때 메이저 언론에선 ‘상추가 금추됐다…소비자 물가 비상’같은 보도를 했고, 나는 ‘생산비는 올랐는데 출하 못하는 농민들 발 동동’이라는 다른 관점의 기사를 썼다. 메이저사 기자들에게는 각종 보도자료가 제보 이메일 한 곳으로 모일 때 나는 전국 곳곳에 포진한 취재원들에게 밤낮 가리지 않고 오는 문자메시지에서 기사거리를 찾았다. 요즘 시세가 말이 아니다, 양파 값이 좀 비싸지니 정부가 바로 외국에서 수입을 하려 한다, 기사 좀 내달라, 그야말로 아우성이었다. 솔직히 그들의 연락이 한 번도 귀찮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끝내는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란 작고 귀여운 사명감으로 못 이기는 척 또 노트북 앞에 앉아 자료조사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2류에게도 진심은 있다. 우리 신문엔 농촌에 막 둥지를 틀어 막막한 젊은이들에게 전문가를 연결해주고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고자 하는 친절함이 있다. 작아지다 못해 사라지기 직전인 시골을, 지방을, 농촌을 지키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는 기자들의 애정이 있다. 그게 비록 누군가에겐 2류로 평가절하 된다 할지라도 나를 비롯한 우리 회사 기자들에게는 일을 그저 일로써만 대하지 않는 뜨거운 마음이 분명 있다. 스스로 ‘2류 연기자’를 자청하는 차인표도 ‘분노의 양치질’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대배우다. 최민식, 송강호보다 그의 연기를 좋아하는 이도 분명 있다. 차인표도 농업 전문지 기자도, 어찌 보면 ‘일류보다 약간 못한 2류(二流)’가 아니라 그저 전문분야가 다를 뿐인 ‘이류(異類)’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