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가정과 불안가정에서 사는 아이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는 헤어지기로 결심한 부부가 이혼소송을 하며 느끼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 10년차인 내가 영화를 보며 가장 이입한 대상은 아내도 남편도 아닌, 부모 사이에 낀 여덟 살 꼬마 헨리였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애정이 사라져 버렸다니, 아무리 이혼이 흔하다 해도 저 작은 아이의 세상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을 텐데. ‘혹시 나 때문일까’란 생각부터 ‘앞으로 누굴 따라가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데, 무덤덤해 보이는 저 아이는 괜찮을까.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자녀에겐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첫째, 엄마와 아빠가 갈라서고 아이는 둘 중 한명과 사는 것. 둘째,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 매일같이 이를 갈고 싸우는 부모를 보는 것. 그러니까 ‘이혼가정에서 사는 것’과 ‘불안가정에서 사는 것’ 중 뭐가 더 나을까. 어릴 적 수없이 많이 해본 상상이다. 교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이었던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때부터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많이 싸울 거면 이혼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자주 말했다. 이혼 권유의 대상이 늘 어머니이던 이유는 엄마는 피해자였고 그나마 내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외벌이 집안이었기에 아버지에게는 경제력이 있었지만 어린 내게는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부모님의 싸움은 아버지의 잦은 외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의부증 환자로 여겼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발정난 짐승으로 취급했다.
어머니의 의심과 추궁에 화가 난, 그러나 딱히 논리적으로 해명할 말이 없던 아버지는 꼭 우리를 탈출한 맹수 같았다. 이따금 그는 주방에 있는 그릇들을 모두 던져 깨부쉈고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는 코렐 광고는 거짓이었다), 베란다와 거실에 줄지어 놓여있던 동양란들도 맞춤한 공격 대상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릇이 깨진 파편은 젖은 걸레로 꼼꼼히 닦아야 나중에라도 발바닥에 그릇 조각이 박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동양란은 보드라운 흙이 채워져 있기에 던져도 소리만 ‘퍽’ 하고 크게 날 뿐 큼직한 조각으로 깨어져 치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덜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거실 한복판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수족관이 어느날 갑자기 없어졌을 때도, TV 브라운관에 움푹 패인 자국이 몇 개나 생겼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의 화는 킹콩이나 고질라가 인간 세계에 침입해 무고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혹시나 나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방문을 닫고 노래나 라디오로 귀를 틀어막았다. 신해철, 이소라, 유희열의 라디오는 목소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가서 둘의 싸움을 말릴 용기나 재간이 어린 나에게는 없었다. 유난히 소리의 데시벨이 높거나 평소와 다른 소리가 나면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돼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며 거실과 안방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발 떨 수밖에 없는 무력한 나 자신이 미웠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부부싸움 후 며칠이 지나면 어른스러운 아이인 척 가족들 모두에게 짜증을 내며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려 애썼다.
‘외도를 하고 세간을 부순다.’ 이것만 보면 나의 아버지는 세상 둘도 없는 쓰레기 같지만, 희한하게 평소 성품은 타인에게 매우 친절하고 자상했다(그래서 여자들의 호감을 샀겠지만). 자녀들을 아끼고 귀하게 대접했으며 세상에 대해 나름 올바른 가치관도 보여줬다. 잡학지식은 또 얼마나 넘치는지 ‘알쓸신잡’ 같은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하룻밤을 꼴딱 새도 족히 떠들 수 있을 만한 잡학박사였고 그 덕분인지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1년으로 따지자면 물건을 깨부순 날은 손에 꼽혔으니 어찌 보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이렇게 기억되는 것이 억울한 측면도 있을 수 있을 터다. 그러나 자녀인 내가 20년도 넘게 지난 그 기억들이 이렇게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을 보면 폭력에 대한 공포는, 특히나 가족 간에 일어나는 폭력을 겪은 트라우마는 무엇으로도 덮거나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하튼 아버지 성품의 아이러니를 몸소 겪으며 어린 나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단편적일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체득했다. 뭐,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인 영향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0대 시절, 나는 부모의 이혼을 간절히 바라는 딸이었다. ‘부모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란 생각이 머리에 차오르기 시작하면 그저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그릇된 행동을 어머니만 모른 척 하면 싸움이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세계를 고요히 지켜줬으면 하고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이혼한다면 둘 중 누굴 따라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 날도 많았다. 감수성이 극에 달한 10대 후반에는 행복한 가정에서 티 없이 밝게 자란 친구들을 보며 내심 속으로 비뚤어진 우월감을 가지기도 했다. ‘너희는 세상이 그렇게 밝은 줄만 알지? 자식들아, 세상이란 말이야, 원래 불공평하고 어둡고 빡센 곳이야. 난 이미 그런 어두운 세상을 겪었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자존심을 지키려 스스로 발동시킨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행복한 가정’에 대해 일종의 강박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마음 속에 어떤 이상향 같은 게 자리 잡은 것이다. 유능하고 자상하며 한눈팔지 않는 아버지와 현명하고 야무진 어머니, 그리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구김살 하나 없는 아이. 내가 꿈꾸고, 또 남들에게 보여주고픈 가정의 모습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SNS에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가정으로 보이고 싶은 나의 욕망이 가득하다. 아직도 열등감이 가슴 깊숙이 자리해 있는지 나는 가끔 진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올려놓은 프로필 사진을 보면 질투가 난다. 가족들과 너저분한 집에서 내복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찍었지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뚝뚝 떨어지는 일상의 사진들 말이다. 모두가 잘 차려입고 기념일에 사진관에 가서 다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은 그들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으로 보여서다.
다시 이혼가정과 불안가정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래서 나는 이혼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불안가정에서 가슴앓이 하며 자란 아이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짐작한다. 아니, 아이의 행복 크기를 비교하려는 내 질문 자체가 우문일 것이다. 주제넘게 영화 속 헨리의 처지를 마음에 걸려 하던 나는 가끔 속 시원히 갈라서는 부모를 지켜보며 자랐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더 결단력 있고, 남의 눈치를 너무 보지 않고,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그저 웃지 않고, 나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 물론 반대로 아버지의 경제력과 어머니의 애정 모두를 잃고 더 많이 방황하는 삶이 아니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마흔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나는 그렇게 으르렁 대면서도 함께 살아준 우리 부모님에게 아주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집에서 어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어쨌든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법적으로는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지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남들에게 구구절절,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며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남들을 의식하고 이렇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자녀란 무엇인가.) 이렇게라도 합리화를 해야 어린 날의 나를, 매일 울며 잠들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해 혼자 가슴앓이 하던 나를,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글을 쓰며 풀어야만 하는 나를, 덜 가여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과거와, 지금도 여전히 부딪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이제 나만 아는 깊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풍덩 던져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