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귀자!"
썸은 타고 있지만 이미 나는 아내로부터 거절을 한 번 겪었기에 이 간단한 한마디를 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나열하며 내 행동을 시뮬레이팅 했었다.
하지만 사귀자는 말을 딱 부러지게 말하지는 못했다. 이게 내 성격이었다. 그래도 만남은 계속 이어나갔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서 내가 사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부산의 야경을 보기 위해 황령산을 오를 때 옆에서 걷던 아내의 손을 나도 모르게 잡고 걸었다. 아내는 말없이 그대로 꼭대기까지 같이 걸었다.
황령산에서 바라보는 부산 야경에 취해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고 아내도 이번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난 이때 '오늘부터 1일'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아내는 장난 섞인 말투로 그때 왜 자기 손을 그렇게 잡고 안 놓았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속으로' 그날 우리 사귀자는 말을 하도 반복해서 우리가 사귀는 줄 알고 좋아서 그랬다고 말했다.
아내는 황당해했다. 자신은 고백을 받은 적이 없다며 펄쩍 뛰었다.
나는 당황했다. 다시 또 제자리걸음인가 생각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아내는 다시 한번 정식으로 고백을 하라고 했다. 참 무드 없게도 잠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나랑 사귀자"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내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내 기억(착각) 속 1일을 지우고 아내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날을 1일로 하게 됐다.
분위기도 제대로 못 잡고 고백을 한 거였지만 4계절을 다 타는 나에게 서른한 살의 가을은 봄처럼 포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