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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원 Jan 13. 2023

비가 오네요.

비가 오는 날의 감수성과 가게 일상

1

비가 오는 날에는 팔고 있는 메뉴의 특성상 굉장히 한가해진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짬뽕 만드는 기술이나 배워볼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청소라도 한 번 더 해보고 테이블이라도 한 번 더 닦아본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쓸 시간도 생긴다.


외부 환풍기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전자레인지 안에서 격렬하게 튀고 있는 팝콘처럼 들린다. 이따금씩 들어오는 배달 주문에는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외쳐본다. 혼자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초밥을 서비스로 몇 개 더 넣어주었다. 소소하지만 이런 서비스로 비가 오는 날에 조금이라도 웃음 짓는 고객이 생겼으면 좋겠다.


배달주문은 비가 오는 날에는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없다. 배달료도 할증이 되고 어떤 주문이든 조금이라도 뭘 더 넣어준다. 그렇게 이득은 되지 않지만 이런 날 주문해 주시는 것 자체에 굉장히 고마워하며 재료를 소진해 나간다. 


2

모처럼 혼자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본다. 당장 다음 달 대출금을 내야 하는 걱정이 잠시 나를 괴롭혔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직 나에게 닥치지 않은 일이다. 더 재미있는 상상으로 넘어가 보았다.


'장사가 잘돼서 이제 알바를 고용해 볼까? 혼자서는 진짜 과로로 쓰러질 것 같은데?'


장사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내 몸이 빠스라져 죽을 것 같은데 장사가 잘되니까 이게 행복하다는 것 말이다. 장사가 잘돼서 내 몸이 골병들어도 행복해하는 상상 다음으로 아들 녀석이 어느새 훌쩍 커서 나랑 캐치볼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리고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 글러브를 끼고 스파링을 하는 상상도... 내 로망이긴 한데 스무 살 때 영화 "GO"를 봤던 영향이 큰 것 같다.


3

이러니저러니해도 주문은 들어온다. 이것저것 쓸 것들을 생각하며 웃음 짓다가 배달 주문 몇 건에 쓸 내용이 머릿속에서 다 날아가버렸다. 아쉬웠다. 노안도 찾아왔다. 작년 건강검진 때 시력은 1.5/1.2였다. 내 신체 기관 중에 유일하게 발달한 부위가 눈인데... 타이핑을 하는 이 순간에도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해 본다. 건강 잘 챙기자.


4

글을 쓰는 동안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이제 점심 영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 가게 구석에 있던 오래된 기타를 손에 들었다. 손님도 뜸한데 대충 아는 코드를 잡아가며 마구 쳐댔다. 

대학생 때 샀으니 17년이 넘은 기타다. 헤드도 부러지고 바디도 성하지 않지만 오늘처럼 비가 올 때, 나 대신 목소리 정도는 내주는 녀석이다. 


G-D-Em(반복) 


잡기 쉬운 코드만 쳤는데 어느새 이 코드는 고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로 바뀌고 있었다. 역시 명곡은 간단한 코드로 이루어져 있음을 다시금 느낀다. 


세상 풍파를 이래저래 겪으며 내 감수성이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춘기 때와는 다른 느낌의 감수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어렸을 때는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사랑 앞에서 심통 부리며 화도 많이 냈었고, 고마워도 고마운 줄 몰랐는데 어느새 사랑 앞에서 사랑한다 말하게 되었고 고마움 앞에서 고맙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건데 이게 뭐라고 40년이나 걸리냐...


비가 잦아듦에 따라 나도 이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녁 영업 준비하러 슬슬 주방에 들어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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