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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원 Jul 07. 2024

고개를 들어 야자수를 보라.

자린고비 이야기

어느 날, 자린고비는 굴비 한 마리를 사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굴비를 즉시 먹지 않고, 오랫동안 두고두고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자린고비는 굴비를 대청마루에 매달아 두고, 식사 때마다 밥 한 숟갈을 뜨고는 굴비를 바라보며 “굴비 맛을 상상”하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굴비를 실제로 먹지 않고도 그 맛을 상상하며 만족감을 느끼려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극한의 절약정신을 교훈삼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맛을 상상하면 그 맛이 느껴지는 부분에서 꽂혀버렸습니다. 시큼한 레몬을 상상하면 입 안에 군침이 도는 것처럼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오늘 아침 공원을 산책하며 느끼게 됐습니다.


사실 형편이 좋지는 않지만 저는 항상 여행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가끔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오는 홈쇼핑의 여행상품들을 보니 너무 가고 싶더군요.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어떤 알고리즘인지 혹은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건지는 몰라도 하필 tv를 틀 때마다 여행 상품이 꼭 몇 개씩은 나오더라고요. 지금 우리 형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여행지들을 보면서 '한국에는 나 빼고 다 잘 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자괴감도 잠시 든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상은 공짜죠. 휴양지 야자수 그늘 밑에서 한가로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모습을 가장 많이 상상했었습니다. 9년 전, 아내가 임신했을 때 태교여행으로 괌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기억이 좋아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차 한 대 빌려서 가고 싶은 곳 아무 곳에나 가고, 먹고 싶은 것 다 사 먹고, 추억을 담은 사진도 많이 찍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오늘 아침 공원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사실 저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눈앞에 야자수가 있는 게 아닙니까? 엥? 여태까지 왜 야자수가 있는 걸 몰랐지? 땅만 보며 걸었으니 몰랐겠죠.

산책길,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야자수

마침 야자수 밑에 벤치가 있어 잠시 숨도 고를 겸해서 앉았습니다. 장마 시즌이라 습하고 더웠지만 이른 아침 아직 해는 구름에 가려 더위는 참을 수 있는 정도였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간헐적으로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습니다.


눈을 감고 여기가 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지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벤치에 벌러덩 누워버렸죠. 여긴 괌이다. 그래 여긴 괌이다. 괌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 일찍 운동하려고 지나가시는 할매, 할배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잠시 누웠다가 일어났습니다. 완벽할 수는 없더라도 잠시나마 휴양지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새콤한 레몬을 베어 문 상상으로 침이 고인 것처럼요.


거참, 생각하기 나름이네요.


한동안 열대 휴양지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면 종종 이 (앙상한) 야자수 밑으로 산책을 하려고요. 땅만 쳐다보며 걷는 버릇도 좀 고쳐야겠습니다. 저는 조금만 고개를 들면 멋진 풍경들이 많은 곳에 살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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