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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이 Mar 27. 2020

여가 활동과 현실 도피의 차이

여행 속에 숨겨진 마음의 짐

아주 오래전 '열심히 일 한 당신, 떠나라' 라는 CF 카피가 한창 유행이었다. 맞는 말이다. 심신이 너무 지치기 전에 자신에게 적당한 활력을 주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여행, 쇼핑, 잠, 맛있는 음식 먹기, 때로는 소량의 알코올 섭취 등으로 잠시 현실의 고단함을 잊는 건 좋다. 하지만 가끔 싸해질 때가 있다. 혹시 내가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 과한 것이 아닐까? 현실 도피가 너무 잦아진 건 아닐까?





여가 활동과 현실 도피를 가르는 기준은 행동의 의도에 있다. 초조함과 절망의 상태에서 더 하기 쉬운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여행의 소란함, 서핑의 전율, 환각제가 주는 비일상적인 의식상태 따위가 일상에서 쌓인 긴장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는 있다. 어쩌면 예쁜 사진 몇 장쯤 건지거나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척해서 친구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당신에게 무엇이 남는가?


미루고 늦추다 보면 이자가 쌓이고 납부 기한은 다가온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지불해야 할 돈은 지금 당장보다 훨씬 더 치르기 힘든 금액이 되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여행길을 걷는 우리의 허리에는 짐 가방만 얹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짐도 얹혀 있다는 사실을.


비행기표나 알약, 약초 따위는 당신의 목적지를 향한 지름길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뛰게 하는 트레드밀과 같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 집중해야만, 진정한 자기 인식과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면밀히 들여다봐야만 얻을 수 있다. 아주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있으므로 흙탕물이 가라앉도록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서 저리로 비행기를 타고 휙 날아가거나 단 1분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해야 할까 봐 두려워서 온갖 활동으로 일정을 꽉꽉 채운다면 흙탕물은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다음에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당장 길을 떠나고 싶거나 업무 혹은 그 외 활동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무엇이 됐든 일단 하던 일을 멈춰야만 한다. 멀리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하지 말고 그 대신 산책을 해보라.



좋은 산책을 하는 방법



그럼 걷기는 우리를 고요로 이끌 수 있는 걸까?


좋은 산책을 하는 비결은 인지하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면서 움직임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휴대폰을 꺼라. 삶을 짓누르는 문제들을 잊어라. 아니 더 정확히는 걸음걸음마다 그 문제들이 그 걸음에 녹아들게 하라. 발을 내려다보라. 발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두 발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움직이는지 보라. 당신이 의식적으로 발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제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가?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낙엽소리를 들어보라. 땅이 당신을 받치고 밀치는 느낌을 느껴보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라. 수 세기 이전에 바로 이곳을 누가 걸어갔을지 상상해보라. 당신이 서 있는 아스팔트를 누가 깔았을지 상상해보라.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나 일에 대한 책임감이 당신을 잡아끄는 것 같거든 걷고 있는 자신을 조금 더 밀어붙여라. 전에 걸어본 적이 있는 길을 걷고 있다면 전에 가본 적 없는 방향으로 갑자기 발길을 돌리거나 언덕 위로 올라가 보라. 낯설고 새로운 주변 환경을 느껴보고 여태 맛본 적 없는 공기를 마셔보라.





제대로 된 산책을 하려면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으면 안 된다. 넋을 놓고 걷다가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자동차 또는 자전거에 치이고 만다. 요점은 전통적인 명상처럼 마음에 이는 모든 생각을 밀어내는 게 아니다. 반대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 마음은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요한 상태다. 제대로만 한다면 이는 다른 방식의 생각이 되고 더욱 건강한 방식의 생각이 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곤경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면 우리는 하나를 닫으면 또 하나 열리는 온갖 정보 속에 사로잡힌다. 거기에 앉아 그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할까? 그저 견디고 앉아서 걷잡을 수 없이 욕지기가 심해지도록 내버려 둬야 할까?


아니다. 결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걸어야 한다.





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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