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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이 Oct 31. 2022

우리는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다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바꿀 것인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끝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오이디푸스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피하려고 집을 떠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졌다. 운명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저 팔자려니 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듯 보인다.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도 힘겨운 삶이 기다릴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살이 꼬이기만 할 때, 벗어나려 노력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때, 한때 잘 나가다가 한바탕 좌절을 겪을 때, 진심을 다한 결과가 배신과 외로움일 때, 남들은 쉽게 잘하는 일이 내게만 유독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운명을 떠올리고 팔자를 탓한다.




과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옛사람들은 ‘없다’고 단언하곤 했다.


 “운명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법, 지혜로도 운명은 막을 수 없다네.
운명을 피하려다간 평생 헛수고만 할 뿐이라네.”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자녀들〉에서)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의 미래사를 맞이하는 법은 결코 없다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에서)


언뜻 상반돼 보이는 말이다. 운명을 피하려는 노력은 소용없지만, 운명에 대비할 필요는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전혀 모순된 말이 아니다. 비가 올 줄 안다고, 비가 오지 않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산 정도는 준비할 수 있지 않은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분투했을 뿐인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고 파멸을 맞이하는 이유를 맹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알려준다.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소.
그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그저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말만 듣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함께 있다가 혹시라도 정말로 아버지를 죽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길은 양아버지를 떠나 친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길이 됐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 테바이의 영웅이 되고 왕비와 결혼했지만, 그 왕비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뒤늦게 아버지의 살인범을 잡겠다며 저주를 쏟아내지만, 그 살인범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오이디푸스가 불행해진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내린 오이디푸스의 모든 선택은 자충수였다.



오이디푸스뿐만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거울을 볼 때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는 대신, ‘되고 싶은’ 또는 ‘보고 싶은’ 자기 자신을 보곤 한다. 자신을 향한 세상의 바람을 자신의 욕망으로 곧잘 오해하고, 혹은 장점만 보거나 단점만 부각해서 보느라고 자신의 진면목을 놓치고 만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속이지만 가장 많이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멋진 척하느라고 힘들어도 안 힘든 척,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한다. 바로 그 마음 알기가 사주풀이다. 나도 모르게 하는 내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는 작업이 명리학 공부다.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사주를 들여다본다. 사주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다. 


사주는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 아니라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대통령이 될 팔자’ 따위는 없다. 그러나 ‘일복 많은 팔자’, ‘먹을 복 있는 팔자’는 있다. 일복 많은 팔자는 일을 잘하니 남들이 일을 맡기고, 일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서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먹을 복 있는 팔자는 말 예쁘게 해서 떡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고 배고프면 체면 생각하지 않고 밥 달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명리학 책을 보면 ‘독수공방할 팔자’, ‘결혼 두 번 할 팔자’도 등장한다. 일반 언어로 풀어보면 ‘남자 생각이 전혀 없는 여자’, ‘이성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팔자에 해당한다고 해서 꼭 독신으로 산다거나 결혼을 여러 번 하지는 않는다. 팔자가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라는,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선언이다.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


사주를 보는 일은 자신을 알려는 노력이다. 자신의 꿈과 욕망을 제대로 알고, 올바르고 적절한 실행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사주팔자가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생겨먹은 대로 살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이다. 팔자를 바꾼다는 것은 자신을 바꾼다는 뜻이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나를 바꾸는 것이고, 나를 바꾸는 것은 생각 없이 당연하게 하는 행동의 다른 가능성을 찾을 때 가능하다. 출근길조차 뻔한 길만 다닌다면, 그 인생 경로 역시 뻔하게 된다.


비극은 드센 팔자에 직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반대로 비극은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 노력의 기록이다. 이기든 지든, 살든 죽든, 한바탕 긴장이 지나면 어쨌든 비극은 끝이 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또 다른 이야기가, 또 다른 도전이, 새로운 한계가 늘 기다린다. 여전히 가장 팍팍하고 고달픈 삶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다. 삶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비극은 또 다른 위로를 준비해뒀다.


지혜는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운명을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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