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의 한계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특히 데이터나 사실, 지식 등을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주인공처럼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킴 픽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픽은 1만 권이나 되는 책의 내용을 모조리 외울 수 있었다. 심지어 책을 읽을 때 왼쪽 눈으로는 왼쪽 페이지를,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페이지를 읽는 방식으로 두 페이지를 한번에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의 모든 도시의 우편번호와 시외 전화 국번, 고속도로 번호를 모두 외웠고 과거의 임의의 정보를 날짜 순서대로 배열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갖춘 픽은
뛰어난 천재였을까?
픽처럼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지식을 개념화하거나 알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어려워한다.
데이터와 사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질 프라이스는 과잉기억 증후군을 진단받은 첫 환자다. 프라이스는 열다섯 살이 된 순간부터 매일을 빠짐없이 기억한다. 다만 일반적인 기억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까워서, 몇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다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 순간 고통스럽거나 감동적이거나 흥분되거나 기쁜 기억에 압도당해 현재의 순간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호주의 레베카 샤록 또한 과잉 기억 증후군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다(이 두 가지는 대개 함께 나타난다). 샤록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세 살 때 일어난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다시 세 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돼요. 제 뇌와 의식은 벌써 성인인데도요”라고 말했다.
미국 연구진이 진행한 한 연구에 따르면 과잉 기억 증후군이 있는 실험 참가자들은 냄새, 소음, 시각적 인상에 특히 예민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이 왜 경험한 일들을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지를 설명한다. 게다가 실험 참가자들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했고 백일몽에 빠지는 경향이 강했다. 어쩌면 계속해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인상 때문에 경험했던 일들이 기억 속에 더욱 깊이 뿌리박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잊어버릴 수 없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여러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연신 갈팡질팡하고,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믿던 상황이 다시 떠올라 난처해지고, 먼 과거의 순간에 계속 얽매여 있어야 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다.
인간에게 망각이 필요한 이유
인간의 기억은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을 골라 과거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억할 내용을 습득하고, 해석하고, 다른 것과 연결한다. 말하자면 커버곡과 비슷하다. 예전에 유행했던 유명한 곡을 다른 음악가가 새로운 해석을 더해 자신의 색을 입히고 다른 박자나 스타일로 재연주하거나 재편곡하는 것처럼 사람의 기억 또한 처음 저장됐을 때와 나중에 회상될 때 조금씩 달라진다. 원본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는 셈이다. 계속 남아 있는 기억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망각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기억,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기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산되는 기억
우리가 ‘오류가 많고’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까지도 속인다’고 비하하는 우리의 기억은 ‘건강한’ 상태일 경우 큰 도움이 된다. 기억은 우리가 앞으로도 그것을 품고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조화롭게 조정된다. 기억은 대부분 사람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하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고, 뜻밖의 일을 당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난관으로 하마터면 꼼짝 못 할 위기에 처했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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