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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이 Oct 19. 2023

축구에서 지면 목숨을 잃던 시절


여러분 최근 베트남과 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보셨나요?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조규성, 황희찬, 이재성, 정우영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모든 선수가 총출동해 시원하고 멋진 경기력을 보여줬는데요! 


결과는? 당연히 승리!



아시안게임 금메달부터 최근 친선 경기까지,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 축구는 우리나라 최고 인기 종목으로 국민들에게 큰 웃음과 감동을 안겨줬는데요. (2002년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는 1인)

매번 축구를 하는 날이면 일찍 퇴근해서 적당히 먹거리와 마실 걸 준비해 경기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축구의 역사


지금은 평화와 건전한 스포츠의 상징인 축구가 경기에서 지면 제물로 받쳐지고, 과도한 승부욕과 폭력성으로 집단 난투극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알고 보면 더 재밌는 동·서양 축구의 역사, 지금 바로 『세상 모든 것의 기원』에서 살펴봐주시길 바랍니다 :)





출처 : 도서 『세상 모든 것의 기원』


동서양에서 고루 발현한 인류 최초의 공놀이


마야문명의 공놀이는 경기에서 지면 목숨을 잃었다. 팀을 가르고 운동장 벽에 달린 골대에 골을 넣는 경기를 했는데, 경기에서 진 사람들은 인신 공양 제물로 바쳐졌다.  흔히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경기를 ‘데스 매치’라고 부르는데, 고대 마야인들에게는 단순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신 공양 제물로 바쳐진 패배팀 선수


마야인들은 공놀이를 할 때 사용한 공이 태양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들에게 공을 주고받는 행위는 곧 빛과 어둠의 세계를 은유했다. 지금까지 중남미 대륙에서는 고대인들이 공놀이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장이 1,500개가 넘게 발견되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길이 96미터에 너비 30미터에 달하는 치첸 이트사(Chichén Itza) 유적이다. 이곳은 오늘날 축구 경기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마야의 치첸 이트사 볼 경기장



또 다른 공놀이의 발상지는 유라시아 초원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목축을 했던 이들에게 공놀이는 무척 자연스러운 놀이였다. 처음에는 동물의 오줌보를 차고 놀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내구성이 있는 가죽으로 공을 만들어서 사용했다. 땅 위에서 하던 공놀이는 이윽고 말 위에서 공을 두고 겨루는 경기로 발전했다. 마상(馬上)에서 이루어진 공놀이는 ‘격구(擊毬)’라고 불리며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현대 축구의 원형, 중국에서 시작되다


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공놀이인 축국(蹴鞠)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경 사이에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북방 초원에 살던 유목 민족으로부터 기마술을 받아들이면서 마상 공놀이도 함께 받아들인다. 하지만 말 위에서 하는 공놀이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이내 자신들에게 걸맞은 방식으로 마상 공놀이를 진화시킨다.


축국은 네모난 경기장에서 동그란 공을 차는 방식이었기에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철학을 구현한 놀이로 여겨졌다. 심판을 엄정히 볼 것을 맹세한 ‘축국의 맹세’도 사료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의 축국에 대한 애호가 얼마나 지극했는지 약 2,200년 전 항처(項處)라는 사람은 탈장으로 몸을 쉬어야 한다는 순우의(한나라 시대 명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축국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축국은 한반도로도 전해져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에까지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도 축국과 관계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혼인 동맹에 대한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는 어느 날 김유신의 집에서 축국을 하게 된다. 김유신은 축국을 하던 도중 고의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끊어지게 만들고 자신의 집에서 수선을 하라고 권한다.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를 불러 김춘추의 옷을 꿰매게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에 자주 왕래하게 되고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사를 통해 한 집안사람이 된다.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삼국시대에는 꽤 인기 있던 축국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그 인기가 수그러든다. 마상 공놀이인 격구가 무과 필수 과목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짐작건대 축국은 신체가 부딪쳐야 하고 다툼이 많은 놀이라 성리학적 유교 사회에서는 크게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민간에서는 축국 대신에 편을 갈라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石戰)이 유행했다.



폭력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현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스포츠였다. 영국 킹스턴 어폰 템스와 체스터 지역에서는 전쟁 중에 베어버린 덴마크 왕자의 머리로 축구 게임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와 유사한 전설이 중국에도 있는데, 황제가 치우(蚩尤,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인물)와 전쟁을 하고 승리한 뒤 그의 머리를 차면서 기념했다고 전해진다. 동서양 양쪽에서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까닭은 (잔인한 상상이지만) 공이 전쟁에서 참수한 적장의 머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 이후 공놀이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은 사회적으로 허용된 폭력의 장이었다.


가령, 근대적인 축구 경기가 시행되기 전 영국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공 하나를 두고 아무런 규칙이 없는 상태로 경기가 벌어졌다. 말이 경기이지 집단 난투극에 가까운 몸싸움이었다. 하지만 이런 ‘무규칙 난투 공놀이’를 통해 폭력성이 해소된 측면도 있었다.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종목인 만큼 ‘훌리건’으로 불리는 극성팬들의 난동 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영국에서는 훌리건 난동으로 인해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맞아 죽은 사건도 벌어졌다(헤이젤 구장 사건). 영국 브래드포드에서도 대낮의 경기장에서 훌리건들의 행패로 5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상황이 생중계되었다.




리버풀 헤이젤 참사



인류는 축구를 처음 시작한 이래 지역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경기 방식을 변주해오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축구가 오랫동안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경기인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에 비해 경기 규칙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승부를 예단할 수 없는 것도 축구의 묘미다. ‘공은 둥글다’라는 말이 있듯이 발끝을 떠난 공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멈추고 잠시 휴전하는 기간 동안 치러졌다. 올림픽이 평화의 상징인 이유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승부를 낼지언정 살육의 시간을 멈춘 인류는 그 순간 평화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축구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느 때보다 지구 곳곳에서 국가 간, 민족 간의 갈등이 극심한 요즘, ‘둥근 공’처럼 ‘둥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출처 : 도서 『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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