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름이 Oct 24. 2023

우리는 언제부터 몸에 이것을 새겼을까?


이제는 패션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타투!

레터링, 그림, 화이트 타투 등 본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하여 몸에 새겨 그 의미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개성의 표현부터 아픔의 흔적 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수단이 된 타투는 사실 고통을 감내하여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하나의 고귀한 문화로 자리 잡았는데요,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 '타투'



과연 타투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으며 우리는 어떤 의미로 몸에 새기기 시작했을까요?


고고학을 통해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책『세상 모든 것의 기원』과 함께 문신의 기원부터 의미, 역할까지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몸에 새긴 바코드

출처: 도서『세상 모든것의 기원』



진화론으로 유명한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이 “이 세상에 문신이 없는 민족은 없다”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문신은 세계 보편적인 문화다. 죽은 사람의 피부는 별다른 보존 조치를 하지 않는 이상 썩어버리기 때문에 문신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고학 자료를 통해 그 시기를 추정할 수는 있다. 



남부 시베리아 타시틱 문화의 데스마스크. 문신이 적 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출처: 바데츠카야 교수의 저서)



동아시아의 경우, 1만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아무르 강 중류의 사카치-알리안 암각화에서 문신을 한 인면상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암각화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문신을 오늘날의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이누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구석기시대 유물 중에는 바늘귀가 없는 바늘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형태로 보았을 때 색소를 묻힌 뒤 피부를 찌르는 문신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오래전 사람들은 어떻게 문신 방법을 알아냈을까? 시작은 몸에 난 흉터였다. 어딘가에 긁히거나 베인 뒤 치료를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씻은 듯 낫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피부에 흔적이 남는다. 옛날 사람들은 몸에 상처가 깊게 나면 약초를 문지르거나 살균 성분이 있는 숯 검댕을 문질렀다. 이후 회복되는 과정에서 약초나 숯의 색소가 침착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침착된 흔적에서 착안해 인류는 몸에 인위적으로 무늬를 새기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까지도 문신 안료로 먹이 사용되었는데, 먹의 주재료 중 하나는 나무를 태우고 남은 그을음이다. 


신분을 알려주는 증명서



문신은 한번 새기면 평생토록 지우기 어렵다. 물론, 요즘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문신을 지울 수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에 문신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나 신분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쓰였다. 특히 왕이나 샤먼들은 문신을 통해 자신의 높은 신분을 드러냈다. 키르기스스탄 샴시에서는 5~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사제가 쓰던 황금 마스크가 출토되었는데, 이 마스크에는 신라 금관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무늬가 뺨에 그려져 있었다. 짐작건대 이 여성은 살아생전 왕관 대신에 왕관 모양의 문신을 했을 것이다. 또한,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부 시베리아인의 데스마스크(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얼굴을 본떠서 만든 안면상)에도 화려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얼굴 문신의 전통이 남미 대륙이나 태평양 섬들에 사는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만 전해지는데, 여러 유물을 통해 오래전 고대 유라시아 전역까지 얼굴 문신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굴된 남성의 미라. 몸이 문신으로 덮여 있다



문신은 유목 전사들의 계급장 역할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러시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2,500년 전의 미라가 여러 구 발견되었다. 유목 전사로 추정되는 미라의 어깨와 허벅지에는 하늘을 나는 사슴 무늬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고분의 크기가 클수록 그곳에서 발견된 미라의 몸에 새겨진 문신의 개수도 많았다. 공을 세우고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문신이 늘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왕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상반신은 물론이고 하반신 곳곳에도 빽빽하게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계급장과도 같은 그 문신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과 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 등을 반영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몽골 초원 일대에는 ‘사슴돌’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거석 기념물이 있다. 2~3미터 높이의 선돌로 겉이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의 사슴으로 빽빽하게 채워져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왜 굳이 사슴 모양이어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파지리크 유적에서 사슴 무늬 문신이 새겨진 미라가 발견되면서 사슴돌의 사슴이 가지는 의미가 명확히 밝혀졌다. 사슴 무늬 문신은 전장에서 죽은 전사의 자랑스러운 계급장이었던 셈이다. 


고대인들의 문신은 대체로 주술적이고 신령한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문신에 쓰이는 재료도 귀한 것을 택해 사용했다. 가령,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미라의 문신에 남겨진 색소를 분석한 결과, 솥에서 떼어낸 숯 검댕임이 밝혀졌다. 제의에 사용될 고기죽을 끓이던 청동 솥의 겉에 붙은 숯 검댕을 문신에 사용한 것이다. 기원전 6세기에 창시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재에서 부활하는 불새나 불을 신성시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불타고 남은 재(숯 검댕)는 힘과 부활을 상징했을 것이다.




고통을 이겨낸 아름다움


문신 과정은 침술과도 비슷해 치료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의 허리 아래 부분에는 마치 침을 놓은 듯 일렬로 점을 찍은 문신이 양쪽으로 남아 있다. 이 부위는 공교롭게도 오래 말을 탈 경우 가장 통증이 심한 요추 부분이다. 기마민족에게 요통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을 터, 바늘로 아픈 부위를 찔러 허리 통증도 줄이고 신령한 힘을 몸에 불어 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신을 완성하려면 바늘로 수백 번, 수천 번 몸이 찔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통을 동반한 채 우리 몸을 도화지 삼아 새겨 넣은 문신은 고대의 정신문화가 담긴 메모리와 같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 문신은 특유의 주술적, 제의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사람들이 몸의 털을 밀고 문신으로 표식을 새겨 넣는 대신 신분과 계급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문신은 근대화하지 못한 야만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문신은 고통을 감내하면 서도 자신의 지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이었다.




* 당신의 일상에 의미와 재미를 더해줄 '감성 지식 교양서'



작가의 이전글 축구에서 지면 목숨을 잃던 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