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와 책임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된다면

by 나름이


얼마 전까지 책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도서선정위원을 맡았는데요. 어느 날 작가분들이 『1984』나 『동물농장』을 다루고 싶다면서 저에게 의견을 물어왔는데요, 저는 그 책들보다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다루는 게 더 낫다고 추천했습니다.

미래 세계의 획일화되고 통제된 모습을 다루기에는 『멋진 신세계』가 더 소름 끼치고 생각해볼 것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 같은 미래가 더 소름 끼치는 이유,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생각해볼까요?





『멋진 신세계』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문명화된 세계에 이단아인 야만인 존이 찾아오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야만인은 치밀한 설계 아래 태어나지 않고 간혹 생기는 자연 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말합니다.



매트릭스10.jpg 영화 <매트릭스> 중 한 장면



『멋진 신세계』의 설정은 파격을 넘어서 파괴적입니다. 우선 생물학적인 수정과 출산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모든 아이들이 철저한 설계를 통해 공장에서 생산됩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이라는 계급과 아이들이 종사하기로 예정된 직업에 맞춰 그에 맞게 처음부터 신체 특성이 조절되어 태어나는데요. 예를 들어보면 화력발전소에서 일할 아이들은 열을 잘 견디게, 수조를 청소할 아이들은 물을 아주 좋아하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리고 조건반사와 수면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갖고 태어난 계급과 직업을 수행할 때 가장 만족하도록 학습되어서 길러집니다. 최하 계층인 입실론 계급은 주로 몸 쓰는 일을 하는데, 이에 맞게 설정되어서 최상층인 알파 계급이 하는 머리 쓰는 일을 맡기면 못 견디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자신의 계급 말고 다른 계급을 넘보는 일이 없습니다.


설계된 아이들은 자신들이 특화된 직업에 종사할 때 가장 만족하니 문제 될 게 없지만, 그래도 혹시 생겨날 우울감이나 불만족은 ‘소마’라는 일종의 중독성 없는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완벽히 차단해버립니다. 그러니 누구나 만족하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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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정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다음 세대를 위한 임신과 출산이라는 의무에서 벗어나고 부모가 될 필요가 없어집니다. 연애는 그야말로 유희가 되어버립니다. 한 사람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필요가 없어지니, 누구나 마음에 드는 이성과 자유롭게 잠자리를 할 수 있어요. 한 번에 여러 명을 만나도 전혀 상관없고요. 오히려 이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하고만 만나고 잠자리를 하면 이상하거나 모자란 사람으로 봐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집착도 없지요.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으니 고부 갈등 같은 것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부양과 관계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죠. 의무는 없고 즐길 수 있는 것들만 있는 세계예요.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병도 없고 노화도 없고 갈등도 없고, 만족과 유희만 있는 세상이 『멋진 신세계』입니다. 불행의 여지가 하나도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이야말로 정말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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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멋진 신세계』는 자주 토론의 주제로 등장하는데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멋진 세상입니다. 애초에 직업적 필요에 의해 설계된 대로 태어나기 때문에 실업이란 있을 수 없고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죠. 애정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고요, 가족 간의 문제 역시 없죠. 가족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가족도 없고 연인도 없는 세계는 외로워야 정상일 것 같지만 외로움 역시 없습니다. 오히려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명제를 지키며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며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권리를 찾아오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찾아온 자유의지를 기술과 시스템에 다시 내어주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일상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자유의지는 게임 같은 가상현실에서나 발산하고 현실은 알고리즘이라는 효율성을 앞세워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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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어떤가요? 이런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나요? 사실 우리의 선택과는 별개로 이런 세계는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앞으로 100년 안에 인간은 신이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수명까지 연장시켜 죽지 않는 인간이 탄생한다는 겁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아이를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많은 의무와 책임들이 없어지거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아예 죽지 않는 인간이라뇨? 그렇게 되면 인간의 역할과 의무가 얼마나 많이 바뀔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무려 100여 년 전에 『멋진 신세계』에서 올더스 헉슬리가 제시한 이 문제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유효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참고 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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