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살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
소위 기대여명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기대할 수 있는 남은 삶의 기간으로, 의사들이 ‘길어야 6개월, 3개월’이라고 말하는 그 숫자다. 일종의 평균값인데, 예를 들어 폐암 4기로 진단받은 환자가 10개월 정도 연명하다 사망한 경우, 폐암 4기의 기대여명 평균은 1년 내외로 알려져 있으므로 ‘평균 범위’ 안에 속한다는 식이다.
문제는 이때 의사와 환자가 생각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의사는 환자 상태에 근거한 평균적인 수치 값을 생각하고, 예상되는 남은 기간에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는 입장이 다르다. 의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대여명은 지금까지의 삶이 고작 몇 개월 뒤면 끝난다는 선언이므로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의사가 자신의 절망이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의사는 아무리 환자의 상처와 충격에 공감하고 절박함을 이해한다고 해도 평균값을 훌쩍 뛰어 넘는 기대여명을 말해줄 수 없고, 또 그렇게 살게 할 방법도 없다. 결국 의사든 환자와 보호자든 현실적인 최선은 각자의 자리에서 ‘남은 날들에 집중한다’에 있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 장기 생존은 어려워 보였다. 에둘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그때 그 환자는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외래에 와서 말하기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야겠다며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와 비슷한 연세의 또 다른 노인 환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대여명을 듣고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건 평균적으로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의사로서 판단하기에 그의 상태로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었다. 내 기대치는 올해까지, 어떻게 해서든 추석만이라도 잘 넘겼으면 싶은데 그는 자꾸만 ‘10년 만 더’를 이야기했다. 물론 모르는 척하고 그가 바라는 답을 해줄 수도 있었다. 적당히 열심히 노력해보자는 말로 다독이고 하는 데까지 하다보면, 환자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눈앞에 둘 때쯤에는 환자가 이미 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환자가 현실을 직시했으면 했다. 환자의 나이가 적든 많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때 남은 삶에 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랜 시간 암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예정된 죽음은 어쩌면 삶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눈앞의 환자에게 물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살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 없나요?”
“….”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중학교 갈 때 교복 한 벌 해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끝내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나 소망 같은 게 없는 것 같았다.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앞의 그 노인 환자가 이례적인 경우였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무엇에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고 산다. 게다가 죽음을 코앞에 둔 노년의 환자가 절망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계획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남은 날을 ‘더 살고 싶다’는 바람만 되뇌며 보내기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눈앞의 노인 환자의 여명을 더 늘려줄 수는 없었다. 그저 그가 남은 시간을 잘 채워갔으면 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라도 사소한 기쁨들을 찾기를 바랐다. 나는 그에게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그 숙제가 너무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그런 것들은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걸까.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에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은 빈칸으로 남겨둔 채 추석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람은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남은 날은 N입니다. 이 날들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 이 내용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