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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이 Jun 07. 2021

지금, <상실의 시대>를 읽어야 하는 이유

저항 운동과 개인주의자

프랑스의 68혁명은 문화혁명의 대표적인 사건인데요, 권위주의 체재에 항거해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일어난 저항 운동입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자체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세계적으로도 전체주의의 권위를 무너뜨린 기념비적인 운동입니다. 그래서 혁명인 것이지요.


이미지 출처 | 리그베다위키


68혁명이라고 하면 낯설어하실 분이 많이 계실 텐데요. 당시 우리 사회가 강력한 독재체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1968년도의 봄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해서입니다. 철저하게 통제되고, 강력하게 압박했기 때문에 이 68 혁명의 불길이 한국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습니다.




『상실의 시대』는 바로 이런 전체주의 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개인주의 시대의 전환기에 대학생이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쓴 하루키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바로 하루키인 것이죠. 일본의 책을 다룰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말이에요.





개인주의자의 탄생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사실 이 소설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인생의 한 시점에 이 소설을 떠올려볼 만한 필요가 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개인주의자의 탄생이라는 면에서입니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습니다. 일본도 전공투세대라고 해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대였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그러한 고민이 전혀 없습니다. 이 소설 어디에서도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죠. 묘사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선배들이 주인공에게 학생운동에 참여하자고 권하니까 “그런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하고 정면으로 부정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입니다. 대학가 전체가 학생운동으로 들썩일 때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와 성에만 매몰되거든요. 바로 이 노골적인 개인주의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맞서는 방법이 됩니다.

전체는 전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율, 도덕 같은 것들을 중요시하는데, 이 개인주의자들은 탈도덕적이고 탈규범적입니다. 68 혁명의 대표적인 슬로건은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입니다. 그리고 ‘금지함을 금지하라’,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같은 것들이 있죠. 그러니까 68혁명은 기존 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는데요, 이런 혁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체주의에 맞서는 방법 역시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죠. 투쟁에 나서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위계를 가지고 운동을 유지하며, 후배들에게 강제하면서 혁명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전체주의에 맞서는 방법 역시 전체주의라면, 그건 권력자가 바뀐 것일 뿐, 체제가 바뀐 것은 아니잖아요.

전체주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방법은 그래서 개인주의
입니다. 전체주의의 규칙과 열정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인 무지향, 무관심 바로 이런 것들이 『상실의 시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흘러 다니는 듯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 와타나베는 한 목적을 위해 모두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는 전체주의 시대에는 도무지 안착할 수 없는 열외자에 불과하지만, 개인주의 시대에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주의 시대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그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설정하는 시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대학생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데올로기, 이념, 혹은 경제적 추구 같은 것들의 우상화 속에서 개인의 취향과 생각, 가치, 그리고 성 등에 집중하는 『상실의 시대』는 새로운 개인주의자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소설이었다는 생각이에요. 『상실의 시대』를 예전에 읽은 분은 최근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된 소설을 한 번 읽어보세요. 내용은 그대로인데 받아들이는 자신이 상당히 달라진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시대에 붙어 있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의 개인주의 취향이 무척 낯설고 불편했다면 지금은 그런 감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보니, 여기 나오는 와타나베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많은 분이 원제로 새로 간행된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데요, 제가 여기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자꾸 쓰는 이유는, 단순히 친근해서가 아니라 이 제목이 훨씬 더 이 소설이 가진 의미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전체주의 시대에는 모두에게 뚜렷한 목적과 가야 할 길, 방향성 등이 명확했습니다. 모두 그 방향을 향해 빠르든 늦든 가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야 할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아요.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죠. 그러니 어떤 길이 정답이고, 어떤 길이 효과적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건 자신의 경우에나 그렇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는 없는 말입니다. 모두 처한 상황과 가진 자산이 다르거든요.





다양성과 가능성을 부여받은 대신에 목적성과 보장성을 상실한 시대가 된 거죠. 이런 시대에 성장 과정에서 정신적 혼란을 겪지 않을 사람은 없죠. 끊임없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더욱 어려운 것은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위치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는 거죠.






* 이 내용은 『지식 편의점 : 문학, 인간의 생애 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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