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장. '성실함'의 배신

숫자는 맞았지만, 계획은 틀렸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저축’을 종교처럼 믿어왔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은 2030 세대에게 “오늘의 커피 한 잔을 아끼면 내일의 부자가 된다”는 절대적인 교리로 변주되어 전해집니다. 금융 전문가들은 여기에 ‘복리의 마법’이라는 그럴듯한 수학적 포장을 더합니다. "매달 100만 원씩, 30년만 꾸준히 모으세요. 그러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 수억 원의 자산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불확실한 세상에서 ‘성실함’ 하나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논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모으는 돈의 ‘숫자’는 불어나지만, 그 돈이 가진 ‘힘(가치)’은 끊임없이 증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잔인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최 사장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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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최 사장의 위대한 결심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 초반으로 가봅시다. 당시 최 사장은 갓 태어난 딸을 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내 딸이 시집갈 때 번듯한 아파트 한 채는 해줘야겠다."

그는 매달 15만 원씩, 딱 30년만 저축해서 1억 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15만 원은 중견기업 직원의 한 달 월급에 맞먹는 거금이었습니다. 그리고 1억 원은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자, 강남의 은마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는, 그야말로 '인생을 바꾸는 돈'이었습니다. 최 사장은 '직원 월급 하나를 통째로 미래에 묻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저축을 시작했습니다. 은행 금리가 연 17%에 달하던 시절, 복리의 마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IMF 외환위기가 와도, 사업이 힘들어도, 딸의 미래를 생각하며 단 한 달도 빠뜨리지 않고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28년이 흘러 2008년, 드디어 만기가 다가왔습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약 1억 1천만 원. 그는 계획했던 ‘숫자’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성실함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차가웠습니다.

1980년에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그 1억 원은, 2008년이 되자 서울 변두리의 전세 보증금을 내기에도 빠듯한 돈이 되어버렸습니다. 강남 아파트는 이미 10억 원을 훌쩍 넘겨버린 뒤였습니다. 30년 전 ‘주택복권 1등’의 가치를 가졌던 그 막대한 돈이, 30년 뒤에는 ‘전세 보증금의 일부’로 쪼그라든 것입니다.

최 사장은 30년 동안 누구보다 성실했습니다. 술 한 잔, 여행 한 번을 참아가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손에 쥔 것은 '집'이 아니라 '허탈함'이었습니다.


물가라는 이름의 ‘복리 저주’

최 사장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목표로 했던 주택복권 1등의 당첨금을 훌쩍 넘겼습니다. 단지 세상이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가 은행의 ‘이자의 복리’를 믿는 동안, 우리가 간과한 더 거대한 괴물, 바로 ‘물가의 복리’가 맹렬한 속도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1980년 500원 하던 짜장면은 30년 뒤 5,000원을 훌쩍 넘겼습니다. 물가는 언제나 복리로 오릅니다. 500원이 550원이 되면, 다음엔 550원을 기준으로 오르기 때문입니다. 최 사장의 돈이 은행에서 8배 불어나는 동안, 그 돈으로 사야 할 아파트와 짜장면의 가격은 20배, 30배 뛰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매달 붓는 돈의 가치 하락’입니다. 최 사장이 처음 넣은 15만 원은 ‘한 사람의 월급’이었지만, 10년 뒤의 15만 원은 ‘일주일치 주급’이 되었고, 20년 뒤에는 ‘며칠 치 아르바이트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달 같은 금액을 넣었지만, 실제로는 매달 ‘점점 더 가치가 없는 돈’을 적립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기 저축’의 함정입니다. 성실하게 숫자를 쌓아 올리는 동안, 그 숫자의 바닥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싱크홀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물가가 안 오를 수는 없나요?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우리가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을 멈추고, 기업들이 더 이상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물가 상승은 멈출지 모릅니다. 어쩌면 떨어질 수도 있겠지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물가를 낮추기 위해 경제 성장을 멈춰야 할까요? 내 월급이 영원히 동결되어도 좋으니 짜장면 가격만 그대로이길 바라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가는 적정한 수준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성장하고, 국가가 발전하며, 우리의 소득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저축의 가치 보존'을 위해 국가적 불황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문제는 이 물가 상승의 속도를 가속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출'이라는 점입니다. 대한민국의 지급준비율은 약 7%입니다. 이는 은행에 100원이 들어오면, 은행은 7원만 남기고 93원을 다시 대출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시중의 화폐량은 원금의 약 14배까지 불어납니다.

우리가 "집을 사겠다", "투자를 하겠다"며 받은 그 대출이, 시중에 돈을 풀고, 그 돈이 다시 물가를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부자로 만들어줄 거라 믿었던 그 '투자(대출)'가, 내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는 셈입니다.


이자의 역습: 삶을 담보로 한 위험한 베팅

더욱이 대출로 만든 투자는 우리의 '현재'를 더욱 가혹하게 만듭니다.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소비를 줄이고, 오직 이자 상환만을 위한 노동을 해야 합니다. 현실을 희생하며 물가를 상승시키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입니다.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는 소득의 전부를 이자 상환에 쏟아붓는 경우입니다. 이때 금리가 조금이라도 오르면,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연체로 이어집니다. 결국 담보 잡힌 아파트는 강제 매각되고, 투자자는 집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쏟아부은 모든 자산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장기 저축'과 '무리한 투자'의 딜레마입니다. 저축만 하자니 물가(복리)에 잡아먹히고, 투자를 하자니 대출(이자)이 내 삶을 위협합니다.


저축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어’하기 위해 하는 것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리의 마법이 없어도 저축은 필요합니다. 저축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막아주는 방패이자,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하지만 저축이 당신의 미래를 온전히 책임져 줄 것이라는 기대, 복리의 마법이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30년 뒤의 5억 원이 지금의 가치를 할 것이라 믿으며, 오늘의 행복과 가능성을 과도하게 희생합니다. 하지만 30년 뒤 그 5억 원이 지금의 1억 원 가치도 못 한다면, 당신이 포기한 30년의 시간과 경험은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 최 사장이 딸과 함께 보내지 못한 그 수많은 주말과 휴가는 1억 1천만 원으로도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젊을 때 커피값을 아끼고 밥값을 아껴서 통장 잔고를 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기술을 익히고, 지식을 확장하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말라는 뜻입니다.

‘줄어드는 가치(화폐)’를 모으기 위해 ‘확장 가능한 가치(나 자신)’를 희생하지 마십시오.

소비를 줄여서 미래를 사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투자하여, 물가 상승을 뛰어넘는 ‘가치 있는 나’를 만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노후 준비입니다. 최 사장의 낡은 지도는 이제 찢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실한 개미가 아니라, 현명한 투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투자의 첫 번째 대상은 주식도, 코인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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