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정규직으로 다시 시작하다.
호기롭게, 패기 있게 퇴사했지만 대기업을 경험한 탓에 눈높이는 쉽게 낮아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이상한 회사들이 떠오르는데, 특히 이 회사가 자꾸 생각난다.
2015년 8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해 여름은 정말 더웠다. 더운 것도 문제였지만 강수량이 적어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당시 내 마음 또한 그 여름날처럼 심각했다. 집에서 가까운 소규모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날 역시 해가 쨍쨍해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까만 정장까지 입었으니 속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회사에 도착하자 한 여자가 나를 대표실로 안내했다. 대표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기보다, 대표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표가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마음속으로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대표가 손으로 발가락 사이를 만지는 모습과, 그 여자가 내어준 차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으려는 내게 그 여자가 마실 것을 물었고, 나는 ‘물’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휴, 그래도 어떻게 물을 줘요. 잠깐만 있어 보세요”라며 전기포트를 꺼냈다. 한여름, 포트 속 물이 활활 끓어오르며 보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 녹차 티백을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 앞에 내밀었다. “줄 게 이거밖에 없어요.” 영상 32도의 열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보자,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회사 대표는 당장 출근하길 원했고, “곧 실장이 오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실장이 오면 나는 당장 그 회사 사람이 될 판이었지만, 다행히도 실장은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대표는 그 사이에 사무실을 구경시켜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후에도 대기업 계약직과 비슷한 조건의 자리라도 지원해 보았지만 서류에서 탈락하거나, 간신히 면접까지 가도 불합격이었다. 공백이 1년 가까이 되자 불안해진 나는 홀로 올림픽공원에 있는 ‘나홀로 나무’를 보러 갔다. 초록색이 정신 건강에 좋다길래 초록빛이 가득한 곳을 찾은 것이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자 조바심과 긴장이 잠시 풀리는 듯했다. 그러던 중 문자가 도착했다. 모 은행 사무행원 채용 서류 합격 소식이었다. 오랜만의 합격이었다.
은행원 하면 흔히 창구 직원을 떠올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은행원도 있다. 은행은 국세청, 세무서, 경찰청, 검찰청, 금융감독원, 지자체 등 다양한 국가기관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은행들과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런 행정 업무까지 창구에서 모두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별도로 사무행원을 뽑는 것이다.
하지만 면접 전에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필기시험이었다. 이 시험 때문에 반쯤 포기하는 심정이었지만, 서점에 가서 은행 필기시험 문제집을 사왔다.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무작정 문제를 풀었다. 마치 어릴 적 예고 없이 치른 IQ 테스트 같았다. 소금물 농도를 계산하고, 동그라미·세모·네모 모양을 뒤집거나 반전시켜 같은 것을 찾고, 문장을 읽고 추론해야 했다. 맞힌 문제는 넘어가고 틀린 것만 해설을 보고 다시 풀며 일주일을 보냈다.
드디어 면접 날. 검은 정장을 입고 머리를 올려 묶은 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오전 2시간 동안 필기시험을 치른 후 곧바로 면접이 진행됐다. 하필 내 번호가 뒤쪽이라 거의 마지막 순서였다. 하루 종일 은행 홍보영상을 보고, 채용 진행자가 준 은행 사보를 읽으며 기다려야 했다.
긴 시간 은행 홍보 영상과 글을 보다 보니, 준비해간 자기소개 대신 은행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루는 인재가 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부족하지만 꼿꼿하고 긍정적이며 온화하고 너그러운 인상을 내보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합격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조에서 면접을 본 사람들도 많이 합격했다.
합격 후 일주일간 연수를 받았다. 수신, 여신, 외환의 기본을 배우고 CS 교육과 품행에 대한 교육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날, 교육팀 팀장이 이렇게 말했다.
“난 지방대 출신이라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힘들었다. 그렇지만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면 오를 수 있으니, 여러분도 사무직군에 머무르지 말고 더 오르려고 노력해라”
나는 그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에 만족하는데 왜 굳이 더 오르라는 말만 하는 걸까.
그렇게 나는 드디어 대기업, 그것도 금융회사에서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상향 이직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