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서거 84주기, 안창호 선생 어록 다시 인기
오는 3월 10일은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8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60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도산은 서거했죠.
그 어느때보다 투표 참여 열기가 높은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산이 소환되는 분위기입니다. 도산의 어록중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님이다’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띠는데요.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4일 SNS를 통해 "정치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은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손님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측도 역시 같은 어록을 인용하며 사전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죠.
도산은 독립운동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일치감치 미국의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해방된 조국을 민주주의적 국가로 만들기를 추구하신 분입니다. 이같은 도산의 민주주의 운동가로서의 사상적 배경이 도산을 이 시대에 다시 소환하는 배경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하자만 사람들은 도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도산 안창호 선생 발자취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세때 도산은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쳤죠.
1905년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 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합니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합니다.
1909년 도산 선생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됩니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 선생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하여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이끌었고,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합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든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선생은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는데요. 결국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 선생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납니다.
서울흥사단, 3월 7일부터 10일까지 추모주간 운영
도산 선생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도산 선생의 60 평생 가운데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었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쳤죠.
선생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한 선생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각한 코로나 여파로 매년 강남 도산공원에서 거행되던 추모식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대신 서울흥사단은 오늘부터 10일까지 추모주간을 선포하고 대학로 흥사단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흥사단 단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헌화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