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이 제안하고, 하태경이 받고... '3만 원권' 격하게 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간략한 차례를 지내고 일찍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은행에 현금을 찾으러 갔다.
오늘은 민족의 큰 명절, 설날이다. 동시에 조카들의 최대 수금날이기도 하다. 아니, 필자의 조카들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과 청소년, 청년들의 최대 수금날이 분명하다.
이번 설에 필자는 조카 6명에게 모두 5만원씩 총 30만원을 주기로 했다. 삼촌이라고 용돈도 변변히 준 적도 없어 ‘1년에 한번인데’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필자의 한 지인은 조카가 9명이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또 대학에 입학한 조카는 4명이라고 한다. 그분은 계산이 복잡한 상황인 듯 보였다.
필자의 조카 ○○이는 이번 설 명절에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단기 설 재벌’이 목표라며 “꺄르르” 웃는 말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또 약간 슬픈 현실이 담긴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직장을 다니기는 하지만 20대 초반 직장인의 주머니 사정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또다른 조카 △△이는 설날 하루 전날, 심부름을 왔다며 음식을 담아서 싸 가지고 왔다. 잠시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에게 물었다.
“△△아 너는 세뱃돈 얼마가 적당한 것 같아?”
“에이 무슨 세뱃돈은. 직장 다니는데 안 줘도 돼. 나는”
“정말이야? 진짜 안 줘도 돼?” 하며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는 주저주저 하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거지, 또 주면 받지. ^^”
누구나 다 마찬가지 마음일게다.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대 최대급 고물가 시대에 20대 초반의 내 조카들은,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의 주머니는 너무나 추운게 현실이다.
하지만 20대만 그런 것 아니다. 대다수의 서민들도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이번 설날은 유난히 이 세뱃돈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예전에는 ‘취업은 언제 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등등의 질문들이 청년들과 구직자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유난히 이번 설 명절에는 세뱃돈이 스트레스의 주범이라고 한다.
인크루트가 지난해 12월 성인남녀 82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설 명절 스트레스 이유 1순위가 이 세뱃돈을 포함한 명절비용 지출(21.8%)이라고 조사됐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최근 직장인 10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날 경비' 여론 조사 결과에서도 직장인들 평균 설 연휴 경비는 54만 원으로 조사됐는데 이 중 16만 4000원이 세뱃돈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세뱃돈은 지금 나이와 직업에 따라 조금씩 편차는 있겠지만 보통 5만원으로 형성된 상황이다. 하지만 이 5만원은 자의반 타의반의 성격이 강하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수 이적의 최근 글이다.
가수 이적씨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3만원권 지폐가 나오면 좋을 듯싶다. 1만원권에서 5만원권은 점프의 폭이 너무 크다”며 “1, 3, 5, 10으로 올라가는 한국인 특유의 감각을 생각해보면 3만원권 지폐는 필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게 1만원을 주긴 뭣하고, 몇 장을 세어서 주는 것도 좀스러워 보일까봐 호기롭게 5만원권을 쥐여 주고는 뒤돌아 후회로 몸부림쳤던 수많은 이들이 3만 원권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하지 않을지”
필자는 이 글에 너무나도 격하게 공감이 갔다. 최근 들어 남의 글을 보고 마치 내 이야기인것처럼 이렇게 크게 공감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가수의 글에 전폭적인 공감을 하는 듯 하다. 무려 2만여개가 넘는 ‘좋아요’가 넘쳐났다고 하니 이건 그저 가십거리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갈구해 왔던가를 방증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보기 드문 공감대는 정치인에게까지 미친 형국이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설날 당일인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3만원권 발행을 적극 찬성한다. 3만원권 발행 촉구 국회 결의안을 추진하겠다”라며 3만원권 지폐 필요성 대열에 합류했다.
하 의원은 “세뱃돈은 우리 국민 모두가 주고받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전통문화다. 1만원 세배돈은 좀 작고 5만원은 너무 부담되는 국민들이 대다수일거다. 미국 달러도 10, 20 50 단위가 있고 유럽의 유로도 그렇다. 한국은 축의금 부조 단위가 1, 3, 5로 커지기 때문에 2만원권보다는 3만원권이 적합할 것 같다”라는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3만원권 도입에 여러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필자도 높은 필요성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3만원권 지폐가 바로 추진돼 빠른 시간안에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그 어느 사안보다도 이 3만원권 지폐 논의는 자의건 타의건 이미 그 논의의 시작이 이뤄진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즉, 시간의 문제인 것이지 필요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설명절은 시간이 흐르면 다시 또 다가오고 우리는 또 명절날 우리의 미래들에게 주머니를 열어 세뱃돈을 또 줄 것이다. 아이들의 수금날은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호기롭게 5만원권을 쥐여 주고 뒤돌아 후회로 몸부림쳤던 수많은 아버지와 삼촌들은 또 생겨날 것이다.
언제, 누구의 얼굴이 담긴 3만원권이 나와 수많은 삼촌들의 몸부림을 해소시켜줄지, 필자는 벌써부터 그 미래를 생각하니 미소와 함께 해방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