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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운동

내 이름은 붉은 돼지

by 느곰씨 오만가치

벚꽃 날리던 봄의 대학은 동아리 모집으로 분주했다. 수업을 받으러 분주히 이동하는 길마다 동아리 홍보를 위한 부스가 널려 있었다. 멀리 붉은색 빛나는 도복을 입고 언월도를 들고 무술 하는 이가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슈' 동아리였다. 날렵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은 황비홍의 기억을 소환했고 무협지를 읽은 이에겐 동경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어 보여 눈으로만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는데 눈앞에 탁구대가 들어왔다. 워낙 가벼운 공이라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 무거운 탁구대를 가지고 나와 설치해 두었다. 봄바람에 어디로 날려갈지 모를 공으로도 즐거운 모습에 웃음이 나고 말았다. 웃음도 잠시, 봄바람 마구를 막아내지 못한 탓에 긴 차로를 따라 공이 굴러왔다.


"저기 탁구 동아리인가요?"


공을 주어 건네며 말을 걸었다. 동아리와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친절하게 탁구대로 안내를 받았지만 바람이 부는 통에 치는 건 무리였다. 학생회관 끄트머리에 있는 탁구장을 가리키며 나중에 찾아오라고 전해줬다. 귀찮음으로 중무장하고 있던 그때 무슨 바람이 불어 수업이 끝난 저녁에 탁구장까지 갈 수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렇게 탁구와의 진한 인연은 시작되었다.


놀 거라고는 산과 들로 뛰어다니는 것 밖에 없던 시골 생활. 그때 유일하고 할 수 있던 실내 운동이 탁구였다. 학교 옆에 붙어 있던 작은 건물 안에는 탁구대 하나가 놓여 있었지만 학교를 관리하시던 아저씨가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탁구는 꽤 귀한 놀이였고 그 문이 열리는 날은 놀이동산에 처음 가는 아이처럼 즐거웠다.


초등학교에서 놀이로 배운 탁구는 중2병 아이들에게는 진지한 대결이 되었고 운동이라고는 못할 것 같은 나라는 아이를 탁구 잘 치는 아이로 바꿔줬다. 그런 자부심은 아무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때까진 그저 놀이에 가까웠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탁구장에 들렀다. 먼저 와 있던 선배가 몸을 풀자며 탁구대 앞으로 갔다. 나의 어설픈 동작들은 선배의 절도 있는 배운 탁구 앞에서는 너무 초라했다. 겉멋 들지 말라는 선배의 무언의 충고였는지도 생태계의 약육강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고수의 서열 정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되자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창립 이래 이렇게 많은 회원이 모인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첫 구보 이후 북적대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도 여느 기수와 비슷한 숫자만이 남게 되었다. 호기심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진지하기만 했던 이들에게 적응할 수 없었던 거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는 잘 되질 않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라는 마음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매일 저녁 훈련을 했고 남들은 놀러 간다는 MT도 훈련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조리를 신고 출발했던 거제도. 친구가 내어준 샌들과 수건 두 장으로 불덩이 같은 발을 겨우 견디며 나흘간의 MT를 마쳤다. 거제도의 절반을 걸어서 이동했고 세 군대의 해수욕장에서 잠을 잤다. 피부가 두 번이나 벗겨질 만큼 뜨거웠던 그날의 기억만큼 힘겨웠던 MT도 추억이 되었다.


취업의 고달픔이 심해지던 시기. 동아리 활동보다 취업이 우선인 사람들이 늘어나 동아리는 늘 회원 부족에 허덕였고 2학년이 되기도 전에 맡았던 운영진의 무게는 탁구만 즐기려고 향했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도 땀에 흠뻑 젖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고 또 그렇게 이겨낼 수 있었다.


군대에서 복귀하던 선배들과의 트러블이 점점 심해져 우리는 거의 대부분 동아리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탁구는 일상에서 멀어졌고 어느새 학과 건물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오고 가며 얼굴을 마주쳤지만 간단히 목례만 할 뿐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다시 탁구를 만났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으로 들어서는 길 구석에 <탁구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그렇게 애증의 탁구는 다시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탁구가 싫어서 놓았던 게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었다.


힘든 회사 생활에 웃음을 주었고 피곤한 출장에 즐거움이기도 했다. 탁구장에 못 가는 날이 짜증 날 정도로 탁구가 치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일이 점점 많아지며 들릴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로 완전히 발 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생기지 않아 가질 못하고 있지만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은 늘 마음에 두고 있다.


손을 거친 수십 자루들 중에 여전히 방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십 수 자루의 블레이드. 그들은 나의 탁구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탁구장에 가는 그 두근거림을 다시 느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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