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에 대하여
뉴 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문자보다는 화면에 더 익숙해져 간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소비하며 만족하는 사람들로 세상은 채워지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문해력 문제'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와 소화시켜 다시 넘겨주는 일련의 과정과 닮아 있다. 우리 중에는 텍스트를 소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만화로도 만들어지고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들은 원작이 궁금해 거꾸로 밟아 오다가 결국 책과 만난다. 그렇게 만난 책은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영화가 더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는 게 보통이다.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되면 만족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베테랑 연기자의 풍성한 감정 표현과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편집이 있어야 만 납득하게 된다. 그만큼 그 풍성함에서 차이가 있다. 가장 실망스러운 예는 바로 흥행한 영화를 책으로 만나는 것이다. 뛰어난 영상미가 사라진 채 만나는 똑같은 이야기는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TV가 나올 때만 해도 라디오가 없으지니 책을 안 보게 되니 말들이 많았다. 그런 TV는 어느새 유튜브나 틱톡으로 확대되어 영상이 없는 곳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세상인데 오히려 팟빵 같은 오디오 플랫폼이 인기를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해석을 가진 콘텐츠에 길들여진 반면 누군가는 그것을 만들려고 더 많은 것을 읽고 공부한다. 그들을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만들어진 콘텐츠는 지식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원본에 닿기 위해서는 결국 문자와 만나야 한다. 문자로 된 수많은 정보만이 그들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구로 인해 문자로 된 콘텐츠는 영원할 것이다. 단지 그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될 것도 사실이다.
이제 문맹은 글을 읽을 수 있냐의 문제가 아니다. 최하층에 존재하고 있는 문자로 남겨진 원본 데이터를 읽고 소화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능력으로 갈리게 될 것이다. 그 옛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90%가 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은 글자를 알았다. GPT4가 나온 시점에 권력의 분기점은 AI가 학습한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AI가 학습할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많이 아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