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은 리더와 어울리지 않는 걸까.
마음이 싱숭생숭한 날이 있다. 할 일도 많지만 마음은 그보다 훨씬 부산스럽다. 그런 날에는 귀에 소음을 조금 넣어줘도 초콜릿을 먹어줘도 해결이 잘 되지 않는다. 역시 피곤해서 그런 걸까. 잠깐의 방심이 졸음을 몰고 오기도 한다. 오히려 집중력을 뺏어가는 쪽을 택한다. 잡생각이라도 사라지면 손가락은 단순 반복을 할 수 있으니까. <민음사 TV>를 열어 문학에 관한 얘기를 듣거나(박혜진 편집장 콘텐츠를 좋아한다) 최재천 교수님이나 김경일 교수님의 강의를 튼다. 이런 채널은 굳이 영상을 보질 않아도 되어 괜찮다.
듣다 보면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강의가 끝났는데 다음 강의를 선택하지 못한 나에게 알고리즘이 예능을 이끌었다. 화면에는 김성근 감독님이 있었다. 그렇게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만났다. 가만히 보니 2기다. 김성근 감독 특유의 일본 발음 섞인 저음을 홀린 듯 계속 쳐다보게 된다.
"돈 받으면 다 프로야"
내가 애들에게 맨날 하던 얘기를 김성근 감독의 입에서 들으니 새롭다. 나마저도 잊어버리고 있던 말인데 순간 흠칫했다. 그렇다. 돈 받으면 다 프로다.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증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금액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상을 보여주든 그 이하를 보여주든 마인드의 문제일 뿐이다. 이왕이면 잘하는 편이 좋다. 대가의 크기는 주는 사람이 정하니까. 먼저 증명하는 것이 보통의 일이다.
보다 보니 예전 서장훈 선수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나와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은퇴 후 방송 출연을 해달라는 부탁에 처음 몇 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계속 방송을 하다 보니 자신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자신이 농구장에서 죽어라고 뛰었듯이 방송국에는 스테프들이 코트 위에 자신처럼 뛰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방송이 종영이라도 되면 스테프는 또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무게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에게 방송은 새로운 경기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부담감에 주눅 들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너무 과한 욕심도 금물이다. 프로는 꾸준해야 한다. 그리고 은퇴의 시점 또한 자신이 알아야 한다. 프로는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김성근 감독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그렇게 몇 개의 장면이 지나간다.
"비정하다는 건 정이 있다는 말이야"
이번에도 얼어붙었다. 프로가 보여줘야 하는 자리라고 해서 그것을 취사 선택하는 것이 리더의 위치는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리더는 또 하나의 프로니까. 프로의 가치를 올려주는 프로의 자리.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그렇다면 수준을 올려줘야지. 그대로 두면 낙인찍히잖아"
안타까웠던 녀석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도 실력을 키워주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지면 모두 감독 탓이라는 김성근 감독님의 말에 변명을 달 수가 없다. 쉽게 늘지 않는 실력, 노력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자기는 안된다는 자포자기. 나는 어느샌가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르칠 시간에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한 게 아닐까 싶어 괜히 미안하고 부끄럽다.
훌륭한 직원들이 있으면 팀장이 없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실험을 구글에서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팀장이 없는 팀의 능률은 떨어졌다. 일류들이 모인 곳에서도 팀을 조율하고 팀원을 보살피는 리더의 역할은 필요했다.
조직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끌고 가겠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님의 마인드였다. 장난처럼 할 것 같지 않아서 <최강야구>의 감독을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예능이지만 프로야구만큼 진지하게 야구에 임하는 선수들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승부에 집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기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고 이겨야 선수들의 연봉도 올릴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리더의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꽤나 구식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시대에는 자신만 잘 챙기는 것이 더 공정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수한 몇 명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조직 생활인 것 같다.
김성근 감독을 보고 있자니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이 생각났다. <호통의 경영>으로 유명했지만 그는 솔선수범하던 리더였다. 그는 요즘 리더들이 호통을 치지 않는 것은 호통을 친 이후에 직원의 마음을 풀어줄 노력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잘못된 것을 제대로 알려주고 상했을 마음을 토닥여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성근 감독님의 말고 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며 학교를 다녔다고 김성근 감독은 말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하러 가는 길이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다고 했다. 매일 기록을 측정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느라 즐거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덕에 공부도 야구도 계속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고 말했다. 달리기가 너무 느려 육상부 코치를 찾아가 빨리 달리는 법을 알려 달라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리막을 달렸다.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마인드가 좋았다. 계속하면 좋아진다는 것이 거의 지론 같았다. 인간은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딪혀 보질 않으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은 그 어려운 일을 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야구장 가는 길이 가장 즐거웠다는 그가 소프트뱅크를 그만둔 이유가 '더 이상 야구장 가는 길이 즐겁지 않아서'라고 했다. 하지만 최강 야구에서 만난 80세를 넘긴 노감독은 야구장 가는 길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