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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Jun 05. 2024

월급 루팡

능력껏 놀아야 한다

  어젯밤 딸아이의 숙제를 도와준다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잔 탓일까?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져 있다. 잠깐 업무를 보고 나면 또 어느새 잡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바쁜 업무가 끝나고 나면 마치 번아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최근에는 이런 상태가 잦다. 나이가 들어 회복이 더디긴 하지만 이 정도까진 않을 텐데 말이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회사 분위기도 한 몫하는 것 같다. 회사 분위기야 어쨌든 내 커리어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점점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왜?'라는 질문이 일하는 도중에 들면 곤란한다. 그건 시작하기 전에 물어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여파로 회사가 잠시 적자 상태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귀국도 못한 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적자였다. 이건 경영진이 투자한 자회사의 적자를 끌어안아 생긴 적자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합병을 한다고 선언한 후 생겼기 때문이다. 매년 적자를 내는 회사를 버리지 못하고 품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회사에 여러 일이 생겨 CEO도 교체가 되었는데 이번에 교체된 CEO가 바로 그 자회사 CEO다. 그렇게 좋은 경영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왜 채택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는 끈 이론이 존재하니까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저성과자다를 자른다는 얘기였다.


  고생하며 일하던 직원들이었다. 회사 적자가 그들 때문이 아닌데 그중 일부를 정리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걔 중에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직원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소문만으로 이미 사기는 떨어졌다. 


  '고객님의 상품이 배송 완료되었습니다'


  집중이 안 되는 나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일도 되지 않는데 바람 씌러 가기 좋은 이유다. 근데 어디서 온 택배일까. 주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도서 리뷰 해달라고 보냈을 거라 생각하고 택배 보관소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출판사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


  '줄리 앤 줄리아? 뭐지? 잘못 왔나?'


  보내는 사람 이름이 도무지 출판사 이름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딱히 기억나는 이름도 없다. 택배 수취란에 사인을 하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주먹만 한 지름의 원기둥 모양의 택배라. 책을 넣을 순 없을 것 같고 브로마이드나 잡지 정도일까. 그런 걸 보내줄 곳은 없는데...


  자리에 앉아 커터 칼로 택배를 뜯고 나서야 알았다. 


 '줄리 앤 줄리아 쿠키!'


  날짜를 보니 11월 11일이다. 빼빼로 데이였다. 주말부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 아내는 또 깜짝 선물을 했다. '뭘 이런 걸 보냈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다. 


 "하나씩 먹어요" 라며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는 사이 당시 나의 팀장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 조직 개편 때문에 팀장 간담회가 있었던 걸로 안다. 뭔가를 많이 얘기한 모양이지만 몇 번 해봐서 안다. 별로 영양가 없는 자리라는 것을. 이럴 땐 팀장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팀장님 이거 하나 드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오늘 간담회 있었다면서요. 잘 다녀오셨어요?"

 "네에"


  팀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CEO가 했다는 농담을 전달해 준다. 최근 있을 권고사직에는 직급이 높고 근속 연수가 긴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랬을 거다.


 "대표님이 부장인데 팀원하고 있다고 집에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하시던데요?"

 "아, 그래요? 보내고 싶으시면 보내도 괜찮은데.."

 "농담일 거예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농담은 구분해서 하시면 좋을 텐데"


  말 한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아무리 농담이라도 지금 분위기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편하고 친해도 상사의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상사들이 편하다고 던진 말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가볍지 않다. 그걸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근데 정말 상관은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도 갈 때는 많았다. 요즘엔 이쪽 일이란 게 힘들다고 소문나서 젊은이들 유입도 적고 실력 있는 사람 구하는 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은 것뿐이다. 인생은 도박이 아니니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인생의 전환기는 자연스러워야지.


  어차피 우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이 말한 '운명적 관계'는 아니니까.

  오히려 서로를 착취하는 '상대적 루팡 관계'에 가깝다.


  한 번의 퇴사를 해 본 경험은 컸다. 마음가짐도 달라져 있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겁박엔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사는 생각보다 나가기 쉬운 곳이었고 내가 떠난다고 문제가 생기고 그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책임 또한 나의 몫은 아니다. 그저 인수인계만 잘해주면 되는 거다. 


  사직서는 심장과 함께 쉴 새 없이 뛰며 살아 있는 듯이 존재해야 했다. 그러려면 경제적 의존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빚지는 것에 민감했다. 수도권보다 지방을 선호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직원을 바라보는 회사의 시선은 굉장히 단순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놀고 있다고 생각했고 프로젝트에 허덕이고 있으면 고생한다고 생각했다. 일을 빨리 마친 능력 있는 직원보다 일에 몰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에게 더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내렸다(물론, 팀장의 관심도 중요하다). 일을 빨리 마친 직원에게는 다른 직원이 끝내지 못한 일을 더한다. 정말 웃긴 일이다. 빠르게 일하려는 마음을 싹 가시게 한다.


  일을 빠르게 정리하고 워라밸을 챙기거나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개인이나 회사 입장에서 득이 되는 일이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매일 일에 허덕여서야 어떻게 일이 제대로 될까.


  얼마 전 뉴스에서 '조용한 사직'에 관한 기사를 봤다.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신조어에는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 만큼 한다는 의미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업무 강도를 리더가 조율하지 못할 정도라면 스스로 조정해야 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잘하기란 쉽지 않다. 게으름은 모든 것을 이기니까.


  난도가 높은 프로젝트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숨 쉴 시간도 없이 프로젝트가 이어지다 보면 준비 없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망하기 딱 좋은 경우다. 다음 프로젝트를 내다보고 자신의 업무를 조율하는 것도 회사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지만 어느 정도 직급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일정을 꽉 채워 일하는 편이었다.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빨리 끝내지 않는다. 조금 허덕이는 모습은 회사에서 핀잔받지 않기 좋은 제스처다.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직전까지 해두고 마침표를 찍진 않는다. 그 사이 다른 것들을 공부하고 테스트해 본다. 일정이 다다르면 비로소 마무리를 한다.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회사는 업무 시간에 자기 계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계발은 퇴근 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업무에 관한 스킬이라면 그것도 업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리더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퇴근하면 술 마시러 가는 게 보통인 리더들은 꼭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하지 않는다고 뭐라 한다. 솔선수범이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강성태 씨의 <18시간 공부법>을 읽고 '루팡 지수'라는 걸 만들었다. 팀장이 되곤 여유라는 게 생기지 않아 업무 하는 시간을 타임워치로 측정해 보는 것이다. 타임 워치를 곁에 두면 아무래도 조금 더 의식하게 되어 집중력이 올라간다. 그럼에도 하루 3시간 일하는 게 쉽지 않다. 각종 회의에 보고, 면담까지 업무 외 업무가 너무 많다. 하루에 14시간을 회사에 있는데 저녁 식사 이후 시간에 3시간을 더한 것만큼 일하는 것이다. 5시간이 될까 모르겠다.


  '불싯 워크'.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다.


  휴식도 업무가 아니냐고 묻는 친구에게 이 방법을 권해 볼까 하다가 관뒀다.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이 왜 이렇게 많지?'라는 물음이 든다면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라는 박명수 씨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난다. 자신이 바쁜 게 다른 사람 일 뒤치다꺼리하다가 그런 거라면 분명 개선이 필요하다.


  회사에서 부지런한 새는 그저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뿐이다. 이왕 많이 할 거면 자신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전정한 월급 루팡은 도둑이 아니라 전략가여야 한다.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해내면서 자신의 여유를 티 내지 않고 챙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유는 커리어를 쌓는데 써야 한다.


  언제가 무적의 '괴도 루팡'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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