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만큼은 지켜줘야지
탁탁탁탁탁...
1, 2, 3, 4, 5... 숫자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쁘다.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한숨에 누른다. 손가락이 꼬이지 않도록 집중한다.
"아싸, 난 15초"
나는 핸드폰을 내밀며 숫자를 인증한다. 무작위로 섞여 있는 1에서 50까지의 숫자를 순서대로 빠르게 누르는 게임이다. 매일 점심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커피 내기를 할 때 한다. 지지 않기 위해 수시로 연습하기도 했다. 오늘은 20초 가까이 나온 차장 하나가 꼴찌가 되었다. 한 잔에 천 오백 원하는 저렴한 커피지만 10명 가까이 되면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차장님 이렇게 한 번씩 쏘시고 하셔야죠?"
그 말에 아이들은 인사를 한다. "차장님, 잘 마시겠습니다" 그리곤 모두 웃는다.
"골라골라"
카드를 빼든 차장은 카운터를 향한다.
"나는 카페모카로 해줘"라며 근처 사원에게 얘기하곤 창가에 앉아 기다린다. 잠시 뒤 커피가 나오고 다 함께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걸으면 정자 모양의 벤치가 있다. 다 같이 둘러앉아 바람을 씌며 커피를 마신다.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예전에는 벤더룸이라고 해서 회사마다 회의실 하나씩 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렇게 둘러앉아 왁자지껄 할 때가 좋다. 시간이 지나면 남아 있는 인원이 몇 안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야 서로 의지도 되고 분위기도 가라앉지 않는다. 그리고 급한 일이 있은 사람이 먼저 퇴근해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팀장님, 저 오늘 먼저 퇴근해도 되나요?"
저녁을 먹고도 한참을 더 일해야 할 것 같은 날이 많았다. 그런데 과장 하나가 쭈뼛쭈뼛 와서는 얘기한다.
"오늘? 오늘이 오는 날이야?"
"네에" 라며 과장은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 가야지, 연애보다 중요한 게 있겠어? 결혼 못하면 배로 일할 각오하고"
나는 그렇게 농담을 던지며 과장의 퇴근을 받았다. 퇴근하는 발걸음에 행복이 묻어 있는 듯 가벼워 보인다. 그런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생긴 건 산적 같은 녀석이 참 순수하다.
"뭐어!!?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모두 놀랬다. 그야 그럴 것이 과장은 회사 노총각 계보를 이을 재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모야 뜯어보면 귀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성격도 약간 사차원이기도 했다. 엉뚱하지만 착해서 많이 알게 되면 잘 지낼 것 같지만 늘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다.
"배신감 드는데?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제가 먼저 가게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서류에 도장 찍기 전까지 모르는 거야"
노총각 계보를 잇고 있는 부장이 눈을 흘긴다. 옆에서 보는 둘의 티키타카는 즐겁다.
고객사 근처 문화센터에 일주일에 두세 번 강의를 혼다고 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그녀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그날은 꼭 정시 퇴근을 요청한다. 그리고 연애 전선을 지켜주는 것은 전우의 도리이기도 하다.
"좋겠다. 퇴근도 일찍 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럼 너도 연애해. 얼마든지 보내줄게"
"아니, 퇴근을 해야 연애를 할 거 아닙니까?"
"저 녀석은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과장은 6개월 만에 청첩장을 가져왔다. 어떻게 사귄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둘의 사정은 둘만의 것이니까. 약속을 지킨 과장의 행복을 응원할 뿐이다. 결혼했으니까 다시 빡세게 일해야지.
"팀장님, 저 오늘 사정이 있어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엔 덩치가 산 만한 차장이다. 늘 당당하던 차장인데 쭈뼛거리니 어색할 지경이다. 뭔 일이 났나 싶어 가보라고 했다. 일이 있다는 데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요. 내일 봐요"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옆에 있는 과장에게 물어봤다.
"뭔 일 있는 거야? 말 못 할 사정이라든지"
"팀장님 모르셨어요? 연애하잖아요"
"응?"
"둘이 연애 잘하고 있는데 여자 쪽 친구들이 입을 얼마나 대는지 요즘 고민이 많더라고요"
"하여튼 훈수 두는 인간들이 문제야"
"그러게요. 그래도 넘어야 할 산. 아니겠습니까?"
"그래? 연애를 하고 있다고..."
다음 날 차장에게 물었다.
"아니, 연애하고 있었다면서요?"
"하하. 그렇게 되었네요"라며 차장은 멋쩍게 웃었다.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요. 잘 되길 바라요"
"네에, 감사합니다"
그런 차장이 벌써 아이가 셋이다.
한날은 중국 출장 중인 팀원에게 전할 말이 있어 Wechat을 열었다. 근데 프로필 사진에 중국 아가씨가 있었다. 턱선이 뾰족한 것이 중국에서 유행하는 어플로 만든 얼굴 같았다. 귀여운 외모였지만 연예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궁금했다. 중국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중국 연예인을 좋아하게 된 건가.
솔로인 친구들은 종종 예쁜 여자 사진을 프로필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뒤 프로필은 지워져 있었다. 질렸나?라는 생각이 들쯤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 중국 출장 누굴 보낼까?" 라며 옆에 과장에게 물었다.
"아 그기라면 당연히 A죠"라고 추천한다.
"A는 계속 출장 중이라서... 곤란하지 않을까?"
"그기 여자친구 있어요"
"응?"
"그 Wechat에 있는 아가씨가 여자친구예요. 어디더라. 차이나 뱅크인가 거기서 일한데요. 중국에서 일할 때 주말만 되면 쉬어도 되냐고 얼마나 그러든지. 알고 보니 연애하고 있더라고요"
"아니.. 일하면서 중국 아가씨를 사귀다니 능력도 좋네"
"몰라요. 한국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중국 가서 사귄 거라고..."
"중국어 빨리 늘겠다"
"둘이 어설픈 영어로 대화하는데 옆에서 보면 웃깁니다. 전번에 대판 싸워서 안 만난다더니 또 좋네요"
"그럼 앞으로 그긴 A가 가는 걸로"
회사엔 여자 사람이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지원팀은 만날 일이 없으니 내가 근무하는 건물에서 여자 사람을 보기란 청소하시는 분과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대부분이다.
"팀장님, 저 이번에 남경에 출장 가는데 복귀는 다른 곳에서 해도 괜찮습니까. 중간 경비는 사비로 지불하겠습니다"
"여자친구 보러 가게?"
"어.. 팀장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능력도 좋아. 그래, 니 맘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연애를 챙겨주는 게 복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혈기 넘치는 청년들에게는 꽤나 큰 고민인 듯하다. 마음이 동했는데 움직일 수 없는 상황만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은 없는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일이 될 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 챙겨주면 바쁜 일이 생기면 알아서 잘한다. 나 역시 아내가 고객사 앞으로 도시락 싸들고 온 적이 있다. 그때 나의 선배들도 나를 조퇴시켜줬다. 마치 군대에 여자 친구가 면회 온 것처럼 말이다. 남자들만의 그런 배려가 있었다.
"연애하는 건 좋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자. 일할 때 티 내지 말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어 자신의 출장 일자를 조율하는 또 다른 팀원에게 조언을 했다. 나는 출장을 좋아하지 않아 팀원들의 모습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출장을 즐겁게 다니는 젊은 사람들의 개방적인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업무에 지장만 없다면 행복하게 일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장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팀장의 작전은 수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