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할 수 있다면, 존재할 수 있다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어수선한 조직개편 사이로 한 통의 연락이 왔다. 새로운 팀을 꾸리려는 데 올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탈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부서장은 팀원을 내어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회장님이 관심 있어하는 조직이라 나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허울만 좋은 팀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기업에서 근무하신 분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 팀장으로는 커리어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내와 얘기를 나눠보니 아내는 흔쾌히 동의를 해줬다. 주말부부를 하는 것이 일에 찌든 얼굴을 보는 것보다 괜찮겠다는 것이 아내의 얘기였다. 그것도 나중에 일에서 벗어났을 때 해준 얘기다.
예상대로 부서장은 이동을 막으려 했다.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나 또한 이동하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바로 얘기했다. 유수의 기업에서 일해본 분과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사표까지 각오한 말이었다. 뭔가 돌파구가 될 것 같았다.
'나의 날개는 내가 지킬 수 있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나무를 믿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날지 못하게 되기 전에 한번 날아보고 싶었다. 팀장으로 부딪친 지난 3년 동안 얻은 것도 있지만 확신을 얻었던 것도 있었다.
커리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회사 독립적 커리어고 또 하나는 회사 의존적 커리어다.
회사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 회사만이 가진 특별한 업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회사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 일은 철저히 배워야 하는 일이고 잘 해내기만 한다면 회사 내에서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인력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업무도 아니다. 그렇기에 회사가 요구하는 일을 착착 해내기만 한다면 철밥통에 가까운 일이다. 회사에서 그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바로 일이 사라지는 순간 커리어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평생직장이라는 단어가 유효하지 않는 시대다. 이제는 그야말로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다. 회사를 옮겨 다니려면 회사 독립적 커리어가 필요하다. 범용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고 트렌드도 예의주시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발전을 해나가야 한다. 꼭 이직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고 기술도 변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내 사정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업무가 바뀌어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인정받게 된다.
"상무님, 이번에도 계약 연장하셨다면서요?"
"어.. 그래. 그냥 이것저것 봐주고 있지"
우스운 일이지만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상무지만 여전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났지만 대체할 인력도 없고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저 임원에서 프리랜서가 되었을 뿐이다. 회사를 떠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평생을 일한 대가가 이거야? 무슨 대단한 곳이라고. 기분 참 더럽네"
어느 팀장은 그렇게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 나 또한 왜 정리해고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대거 잘린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회사 밖에서 더 잘 살고 있다. 회사만 다녀 처음엔 초조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적응했다. 회사 밖은 전쟁터라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에겐 기회의 땅이었다.
회사를 오래 다니면 회사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귀찮고 불안할 수도 있다. 회사를 나가 생존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모두에게 중요하다. 회사 밖의 막연함은 모두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린 모두 회사 밖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회사라는 건물을 이루는 작은 벽돌이 되어 건물 어디 틈에 끼여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건지도 모른다. 너무 꽉 끼여서 빼내기가 어려워진 건지도 모른다. 나에게 딱 맞는 장소라고 자기 합리화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회사를 너무 사랑해서도 너무 의존해도 안된다. 회사에서도 늘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으려면 자신의 일에서 그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탐색하고 어떤 일을 맡게 되어도 공통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또 능숙해지도록 노력한다. 내가 원하는 일을 만나는 건 행운이지만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은 일이 대부분이다.
인을 전체와 부분으로 나눠 생각해 보면, 회사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나의 인생은 삶의 한 부분일 수 있다. 인생은 아주 긴 게임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미니게임이 존재한다. 시간은 늘 흐르고 있고 어떤 게임을 할 건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그리고 어떤 게임이든 결과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남겨야 하는 것도 그렇지 못할 경우 빨리 그만두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나는 불만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챙기고 그것이 더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떠나야 한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하지 않는 자신을 자랑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일해야 한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기 위한 투자다.
일본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사원의 마음가짐>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회사에 다니기로 했다면 열심히 다녀야 한다. 회사와 개인의 만남은 '운명적 만남'이다. 어느 한쪽의 선택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회사는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을 택한 것이고 직원은 수많은 회사 중에 한 곳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운명적 만남이라 할 수 있다. 회사는 이를 소중히 여기고 살펴야 하고 직원은 힘껏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다. 정말 3년을 노력했는데도 잘할 수 없다면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와다 이치로는 <18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한 12가지>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다. 커리어는 복리의 법칙을 따른다. 하루를 넘치게 산 사람과 하루를 모자라게 산 사람의 1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1.01^365 ≒ 37.8
0.99^365 ≒ 0.026
커리어에 퇴보가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지만 발전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건 명백하다. 입사 첫날부터 사장을 목표로 전력 질주해야 하는 것도 자신을 위함이다. 사장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을 이끈다. 대신 떠날 때에는 쿨하게 떠날 수도 있어야 한다. 직장 생활은 어차피 하나의 게임이고 게임에 참여하는 동안에 진심으로 승리를 바라고 몰두하면 된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지만 야생에는 규칙이 없다. 회사는 야생에 가깝다. 자신의 능력은 물론 인관관계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 한다. 게임을 살피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인지 취향은 맞는지도 살펴야 한다. 더 잘할 수 없다면 본전 생각 말고 떠나야 한다. 판을 갈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