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나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힘
회사는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다. '왜'라는 물음이 의미 없는 일과 또 그것을 해내야 하는 건 마치 극한체험의 일부인 듯 하다. 한계를 시험하고 또 새로운 선을 긋는다. 실패가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힘겨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꾸역꾸역 해나다가 보면 어느새 또 마무리가 되어 있다. 회사는 어쩌면 챗바퀴에서 빠져 나오는 인간을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 부장은 '시연 불가'라는 통보를 했다. 주말도 반납해 가며 일을 했지만 시연 전날 고객사에서 전달된 샘플은 최초 것과 달랐다. 영업은 도대체 어떻게 일하는 건지 한숨만 나왔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시도는 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시연을 해서는 안된다. 일은 회사에서 벌였지만 책임은 개인에서 나온다.
'두 시료의 크기가 같을 것으로 생각하고 진행했으나, 두 시료는 5mm 정도의 크기 차이가 있어 준비된 상태로 진행이 어렵습니다.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면 고객 시연은 무의미 하므로 시연 날짜를 연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객 시연'과 같은 중요한 이벤트를 이렇게 허술하게 준비했다는 것이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장 부장은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 인원이 없어서 부랴부랴 지원한 상태였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지만 회사는 결과만 본다. 샘플이 잘못 제공된 고객을 탓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 전에 담당자도 없는 시연하겠다고 설쳤다는 것도 반성해야 한다. 그래도 해보겠다고 열심히 준비했다. 과정이 무시되고 답만 찾는 찜찜함은 결국 사달을 내고 만 것이다.
고객은 일정대로 방문했고 장 부장은 현장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며 할 수 있는 수준만큼 보여줬다. 이 상태도 진행해서는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아서 일정 때문에 무시했던 과정을 하나씩 밟아갔다. 고객이 떠난 뒤에 비로소 제대로된 시연이 준비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방문한 고객에게 제대로 된 시연을 할 수 있었다.
팀 간 조율되지 않는 업무에서 오는 분노와 스트레스.
준비되지 않은 환경과 촉박한 일정에서 오는 압박.
루틴은 연속에서 밀려드는 심리적 관성을 멈추게 해주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업무 시작 전까지의 아침 루틴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시간이었다.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만들어야 하는 여유.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웃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장 부장은 일부러 재밌는 책을 골랐다)
위대한 사람들은 '루틴'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날 일을 차분히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익숙함은 마음의 편안함과 동시 에너지를 적게 쓰는 행동이다. 패턴과 루틴은 꽤 유사한 개념이다. 일상과 멀어지는 시간. 자신의 세계로의 도피. 루틴은 그런 효과가 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빠져 나와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쉬는 행위와 같다.
사람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집중해서 하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많다. 특히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몰입을 하는 순간에는 에너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느끼지 못한 사이 일은 마무리 된다. 몸에 베인 행동은 자연스럽다. 머리와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가장 많이 필요한 부분이 바로 '선택'이다. 루틴은 이미 선택된 행동이다. 잠을 자듯 밥을 먹듯 그리고 멍을 때리듯 그냥 (이미 하기로 한) 하면 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업무 속에서도 장 부장은 자신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모든 루틴을 지킬 수 없을 때에도 아침 루틴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했다. 일의 주도권을 쥐려면 능력과 노력과 체력이 필요하다. 내 삶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새벽에 홀로 앉은 회사 책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일을 주도한다는 것 그 속에 빠져든다는 것은 꽤나 황홀한 일이다.
'프로답게 일하라'고 매번 얘기하지만 회사 그 자체는 얼마나 프로다울까. 어설픈 전략, 동네 축구 같은 일처리, 지르고 수습하기. 한 마디로 전략이 없다. 일은 '왜'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에 답할 근거가 없다. 프로는 '예상 가능해야 한다'. 어쩌다 터트리는 만루 홈런이 아닌 꾸준한 안타를 때리며 출루해야 한다. 프로는 타율로 말한다.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는 건 아마추어지만 황홀경에 가깝다. 팀웍이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팀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불태우는 건 자살 행위와 같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지 못하면 무리하게 된다. 자신의 에너지 마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번씩 한계를 경험해 봐야 한다. 인생에서는 꾸준한 안타보다 짜릿한 만루 홈런이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장 부장이 입사했을 때만 해도 후배의 실수를 바로 잡아 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지켜볼 수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게 시간 싸움이다. 교육은 경험에서 주입식으로 변해 간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지식이 되기 힘들고 주입식 교육은 수동적 인간을 만들어낼 뿐이다. 경력자는 일하기 바쁘고 신입은 허드렛일 하느라 분주하다.
로봇처럼 일하는 삶 속에 자신의 의미를 찾고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최대한 적은 에너지로 삶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이야 말로 바로 '루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