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지기 Nov 08. 2023

입덧? 유난 좀 떨지마.

 “입덧? 임신했다고 유난 좀 떨지마. 나때는...”

그녀가 말한다. 나때는 하며 말하는 뒷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알아. 안다고. 엄마는 시골에서 힘들었다는거. 근데 지금 나한테 할 소리가 아니잖아. 지금 싸우고 싶지 않아’     

8개월동안 토덧이였다. 

몸은 붓고 온 세상의 냄새가 나를 공격해왔다.

그중에서 사람 냄새가 제일 역했다.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나는 세상이 노랗다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3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에는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처였을 그곳이 나에게는 멀어져서 너무나 다행인 곳이 되었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아, 원래부터 그랬다. 

어릴 때 아빠와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냥 하라고 할 걸.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와 동생의 밥을 차리고 뒤치다꺼리를 해야할 사람이 엄마가 아니면 내가 될 것 같아서 참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25년이 흘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는 집에서 엄마는 왕이 되었다. 아빠는 더 이상 술을 먹고 물건을 때려부술 힘이 없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살고 있다.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이혼을 막았다. 13살의 나는 엄마의 지옥을 지켜보며 함께 지옥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음으로 독립을 해야 할 20대에도 그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시골의 그곳에 엄마를 묶어놓았다. 엄마의 형제들과 아빠의 형제들은 나한테 말한다. 너희 부모가 안쓰럽다고. 불쌍하지 않냐고.(왜 나한테만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불쌍한지는 모르겠고 나도 그 지옥에 언제나 묶여있었다.     


평일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는 농사일을 도왔다. 

주말에 할 일이 없어도 집에 붙어있었다. 나는 언제나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방에 숨어있었다. 

이게 내가 엄마에게 보이는 미안함의 표시였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 수 없었다.  

    

스무살에 대학교 기숙사에 살며 온라인 쇼핑이라는 것을 처음했다. 

택배를 시켰는데 택배 주소지의 연락처에 시골 집 번호를 적었었나보다. 쇼핑몰 사장님이 품절된 상품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어떤 옷을 샀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이후에 내 핸드폰으로 전화한 사장님은 그녀가 화가 좀 나신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눈물이 났다. 

이후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 넌 좋겠다. 옷도 막 사입고. 난...(어쩌구 저쩌구...)”

     

우린 이런식이었다. 20대의 나는 딸을 질투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화가 나지만 그때는 그냥 숨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나 화목한 가정을 꿈꿨다. 나의 본 모습은 숨기면서 계속 전화를 했고 자주 집에 갔다. 그래도 내 부모니깐. 


하지만 나의 입덧에 유난 떨지말라고 응수하는 그 말에 출산 전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출산 쯔음 그녀는 왜 전화를 하지 않느냐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냥 힘들었다고 얘기했다. ‘힘들었어. 정말로’     


출산을 하고 나니 모성애가 없을 것 같던 나도 아기가 너무나 이뻣다.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나를 때렸을까. 사랑스럽고 소중한 마음은 있기는 했을까? 모든게 의문투성이였다. 엄마가 된 나는 더욱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망스러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째를 가졌을 때부터 책을 조금씩 읽었다. 「가족의 두 얼굴」에서 ‘홀로서기를 잘 할수록 가족이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소통을 해야한다고.

그때는 우리 집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에서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나보다. 아이들에게 화목한 가정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내 마음이 어느정도 진정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마음 먹었을 때 소통을 시도했다.   

  

“엄마가 나 어릴 때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으로 나를 때렸던거 기억나?”

“내가? 기억이 안나는데~”

“내가 첫째 임신했을 때 엄마가 유난떨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 진짜 연끊고 살고 싶었어”

“정말 기억이 안난다. 내가 그런말을 했다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표정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말을 하지 않는다. 

그거 하나만이라도 됐다.     


엄마는 주로 여러 TV프로그램에서 가족의 관계를 배우고 있다.

나는 책에서 배우고 있다.

그리고 만나서 얘기를 한다. 동생은 여러번 울었다.

함께 여행도 한번 가본적 없는 나의 가족은 이제야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용서와 용기를 배운다. 이제야 나는 방법을 찾아내서 해결하는 성장형 인간이 된 것 같다.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열심히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나의 엄마도 성장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잔소리 좀 하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