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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6. 2022

성주 아지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기구한 인생을 살아낸 여인 이야기


사람의 심성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도 한 사람이 있는데,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누구에게나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 아지매'가 나에게는 그런 사람으로 마음에 남아있다.


나에게는 당숙모가 되는 그분은 작은 키에 마른 얼굴이었지만 항상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6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나와 한 살 차이 나는 6촌이 있어 서로 죽이 잘 맞아 시시때때로 그 집을 드나들면서 놀았다. 귀찮게 했을 법도 했을 텐데 당숙모는 싫은 내색 하나도 없이 궁핍한 살림에도 먹을 것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나이 3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고구마 줄기 같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위로는 90세가 다 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에 처해 있었고, 철 모르는 어린 나에게는 그 고난이란 알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삶의 무서움에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40년 후, 늙으신 어머니로부터 당숙모의 인생역정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진 인생의 굴곡을 넘고 살아온 세월도 대단하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전쟁과 같은 삶을 삼키고도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 심성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해 아연하였다.


당숙는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착취로 조선이 메말라 갈 무렵, 경북 성주어느 마을에 여주 이 씨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지 1주일 후에 산후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던 생모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 후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박해에 눈칫밥을 먹다가 10세도 못되어 먼 친척의 부엌데기로 팔려가게 되었다. 근 십 년의 식모살이에 노임 한 푼 없이, 시집보내 준다는 공치사에 퉁치고, 나의 5촌 당숙에게 영문도 모른 체 우리 동네로 시집오게 되었다.


당숙은 천하의 한량이자 노름꾼에, 술꾼에, 게으름뱅이였다. 아무리 혼사를 넣어도 남의 집 귀한 딸의 신세를 망치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두들 손사래를 치고는 물러나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런 차에 중매의 손이 닿아 추수한 벼 몇 가마니가 오며 가고 난 후 그래도 꽃가마를 타고 19세에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올리게 되었다.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곡식을 중계하던 나의 조부(그에게는 큰삼촌)로 인해 총각귀신이 될뻔한 당숙을 그나마 상투라도 틀게 해 준 것이었다. 동네 윗마을 귀퉁이에 두 칸짜리 초가를 지어 살림을 내어주고 천수답이더라도 두어 마지기 논을 일구어 먹고살게 해 준 것은, 백수건달인 조카에게 시집와준 질부에 대한 배려였던 것이었다.


아무튼 홀시어머니에 딸린 망나니 아들에게 시집온 당숙모는 참으로 현모양처 그 자체였다. 부지런하고 시어머니께 효도하고, 남편 우러러 모시고 아들 딸 쑥쑥 잘 낳아 사랑으로 키우고, 모든 것이 조선의 법도를 잘 따르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문제였다. 천하의 남봉꾼이라 혼인 초에 잠시라도 가정을 돌본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 번쯤 남들처럼 그렇게 해본 것일 뿐, 본성이 이끄는 데로 노름판으로 돌아가 버렸다.


술에다 노름에다 마누라 개 패듯이 손찌검을 일삼는 와중에도 줄줄이 자식은 태어났다. 아들, 아들, 딸, 아들, 아들, 아들, 대책 없이 자식들은 태어나는데도 살림은 갈수록 곤궁해지고 술에 절은 가장마저 앓아눕는 바람에 동네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지 않고는 살기가 불가능한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어머니께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셨는지 아직도 서로 간의 정은 멀어지지 않고 그때의 암묵적인 역학관계에 우리들은 철없이 놀기만 하였던 것 같다.


남편이 40대 초반에 병을 얻어 앓아누웠고 죽어가는 남편의 병시중도 만만치 아니하였다. 남편이 죽는 날에도 어머니는 불쌍한 당숙모를 돕고 있었다. 가끔씩 숨을 몰아 쉬던 당숙은 늦은 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마지막 힘을 다해 고함치는 장면을 어머니가 보았다고 했다.


" 나 아직 안 죽나 보네! "


그날 새벽에 당숙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시신을 병풍 뒤에 두고 향불을 피우고 장례준비와 조문객 음식 준비로 어머니와 당숙모는 슬퍼할 겨를이나 눈물 흘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바쁘게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아니 억지라도 곡을 하라는 어른들의 강요에 곡을 하다가 어찌하여 눈물샘이 터져 울 수 있었다.


상가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새벽에 당숙모를 혼자 둘 수 없어 어머니와 함께 밤을 새웠는데, 그녀는 잠에 쓸어져 코를 크게 고는 것이었다. 병간호와 남편의 초상에 얼마나 몰두하였는지 병풍 뒤에 남편의 시신이 놓여있는데도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무서웠다고 했다.


과부 시어머니와 과부 새댁과 그에 따른 자식들과의 세월은 모질게 흘러갔다.


다행히 자식들은 올바르게 자라났다. 대학교육까지는 못 시켜도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시켰고 막내는 공부를 잘하여 장학생으로 대학까지 마치고 대기업의 좋은 직장에 취직하였다. 큰 아들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였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반면교사라고 했던가. 장남인 6촌 형은 아버지가 했던 것만 따라 하지 않으면  된다는 일념으로 평생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노름, 계집질 이러한 것은 생각지도 않을뿐더러 동네에서 인정을 받아 면장 아래 마을행정을 총괄하는 이장에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동생들이 술을 마신다하면 뺨을 때리며 아버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당숙모는 참한 며느리를 맞아 손자, 손녀를 보고 그동안 인생의 질곡에 대해 보상을 받는 듯하였다. 


그러나 짧은 행복이 지나가고 또다시 불행이 시작되었다.


남편 사별 후에 하늘같이 믿고 의지하던 큰 아들이 병을 얻고 말았다. 그동안 콩팥기능이 안 좋다 하여 아슬아슬하던 차에 버섯을 먹고 나았다는 낭설을 믿고 큰돈을 들여 달여먹은 버섯 때문에 마지막 남은 신장기능마저 아얘 멈춰버린 것이었다.


만성 신부전으로 1주일에 3번씩 읍내 병원에 들러 복막투석으로 오줌을 걸러 내어야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단명하였던 것도 이러한 체질에서 기인되었을 수도 있고 그럭저럭 투석하다가 신장이식이라는 희망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던 큰 아들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급사하고 만 것이었다.


 신작로라고 하였던 동네 앞, 비포장 도로가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현대문명의 이기가 나의 불쌍한 6촌형에게 사고로 닥친 것이었다. 운송비를 아끼려고 고속도로를 피해 과적, 과속하는 화물차에게 치인 것이었다. 브레이크 등도 없는 경운기를 몰고, 해거름 저녁까지 죽어라 일하다 돌아오는 길에 10톤도 넘는 화물차가 그를 덮쳐, 유언장 하나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나이 오십을 겨우 넘긴 때였다.


, 세월은 흘러 둘째 아들조차 50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사업으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던 그도 부부가 떨어져 따로 살다가 어느 날 혼자 홀연히 죽음을 맞이 하였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성주 아지매'는 혼자된 며느리와 함께 고향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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