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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7. 2022

순희 이모

기구하고 박복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여인의 일생

자가 기구한 인생이 있다.


한 사람이 태어 나서 죽기까지 어떤 운명적인 설계에 의해 정해진 을 살다 간다는 것이 사실일까?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사주에다 천간의 10개, 지간의 12개를 조합한 8개의 자수로 운명이 결정되는 '사주팔자'를 믿어 왔다.


과연 사주팔자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나의 먼 친척인 순희 이모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한다면 하나의 일례가 될 수 있고 운명론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어릴 적, 내가 본 순희 이모는 피부가 곱고 아름다운 자태로 집안의 네 딸 중에 인물이 가장 나았다. 인삼재배와 약초 거래로 큰 재산을 모았던 아버지는 본인의 셋째 딸을 남부럽지 않은 양반가의 부잣집에 시집보내기 위해 여러 곳에 매파를 넣었다. 최종적으로 방앗간을 크게 하는 밀양 박 씨 문중에 시집을 보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못마땅해하는 시어머니의 구박이 도를 지나쳐 손찌검까지 당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신랑과 자는 방에도 들어와 부부 사이에 누워 부부의 합방조차도 방해하였다고 하였다.


때는 1960년대, 500년의 조선역사가 세계열강들의 야욕 속으로 사라지고 만 뒤에도 수도와 먼 지방의 경상도에는 조선 유교 법도의 잔재가 우리나라 여성들을 결박하고 있을 때였다. 삼강오륜에서 부부는 유별하고 여자는 일부종사하여야 하며 칠거지악에 항거할 수 없는 부인은 출가외인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었다.


하루하루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다 친정에 호소하여 보았으나 양반의 법도에 충실한 그녀의 부친은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냉정하게 무시하였다. 결국 결혼한 지 6개월도 안되어 시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도망 나왔는지, 아니면 소박 받고 쫓겨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집을 나왔다.


요즘 같으면 장모가 쌍심지를 켜고 딸을 집으로 데려 오겠지만 그 당시는 시집간 딸이 소박을 당해 친정에 오면 동네의 우사요 안망신이라 친정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인척이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어린 소년으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냥하고 나긋나긋하며 처녀 같은 여인이 우리 집에서 당분간 같이 살게 되었다니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하루는 흙바닥에서 뒹굴며 놀다가 집에 온 나에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아이! 얼굴이 이게 뭐람!"


손수 세숫대야에 물을 떠 와서 나의 얼굴을 씻겨 주는 것이 아닌가! 당분간 우리 집에서 기숙하는 미안함을 아이를 아끼는 마음으로 풀어 나가고 싶을 수도 있겠고, 시집가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안되니 남의 아이를 통해서라도 대리 만족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섬섬옥수라고 하는 고운 손으로 나의 얼굴을 씻겨 주던 그 아름다운 향기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졸지에 소박맞은 여인, 과부 아닌 생과부가 되어버린 순희 이모는 주위의 안타까운 염려로 재취 자리를 알아보다가 부산의 한 사업가가 일찍 상처를 하고 홀아비로 살아간다는 사람에 선이 닿았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능력 있다는 사업가로 줄줄이 딸 넷을 낳고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부인 덕에 재혼할 여인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이 차는 좀 많긴 하지만 오도 갈 때 없는 이 지경에 더운밥, 찬 밥 가릴 처지가 못되었던 순희 이모는 자상한 그의 성격에 반해 서둘러 재가를 하였다.


두 번째로 가정을 이룬 그 남자는 그야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부산에서 해군 관련 군수품 무역을 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고 양옥 주택과 토지, 그리고 그 당시에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순희 이모에게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성격조차도 부드럽고 원만하여 남자로부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고 여인의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 주었던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야말로 순희 이모는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서 천국의 달콤함으로 갑자기 승천하게 된 꼴이었다. 주위의 부러움을 부끄러워하며 한편으로 계모로서 네 아이를 보살피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갔다.


간절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남편에게 첫째는 딸을 낳았으나 둘째는 드디어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대를 이어주는 아들을 얻은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부부와 5녀 1남을 이룬 대가족으로 남편의 사업도 평탄 가도를 달리며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만끽하였다.


기구한 운명의 불행은 순희 이모를 비켜가지 않았다.


남편의 나이 50에서 1년을 앞둔 어느 날, 피를 토하여 응급실로 실려 갔다. 평소 배앓이를 자주 하고 소화가 잘 안 된다 하여 소화제나 제산제를 장복해 오던 터였다. 최근에 식욕도 없고 살도 자꾸 빠져 검사해 보자고 하던 것을 사업의 바쁜 일정으로 미루고 있던 차였다. 진단 결과는 위암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견이었다. 그것도 위암 4기로 폐와 골수에 암세포가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순희 이모는 남편의 병 치료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남편만 살릴 수 있다면 모든 재산도 아깝지 않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원에서의 희망이 좌절되자 믿지도 않던 하나님을 찾아 사이비 구설수에 오르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당시 돈으로 1억을 현금으로 찾아서 남편에게 해 줄 만한 모든 것을 다 해 보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돈을 남편을 위해 써도 써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도 했다. 병 앞에 장사는 없다고 했듯이 불쌍한 남편은  아내여섯 아이들을 뒤로하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많은 헌금을 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효과는 없었고, 교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주선해 주며 하늘나라의 천국으로 갔다고 설교해주는 마음의 위로뿐이었다.


또다시 순희 이모는 행복한 인생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불행의 늪으로 내 팽개쳐지고 말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 여인 혼자서 6명의 자녀를 거느리고 어떻게 살아 간단 말인가!


그로부터 그녀는 교회의 열혈 신자로서 마음을 의탁하고 남편이 남긴 적지 않은 재산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특히 하나뿐인 막내아들에게는 남편의 분신처럼 집착에 가까운 맹렬한 사랑을 퍼부었다.


무심한 세월이 그 마음씨 곱던 순희 이모를 황야에서 겁먹은 어미 사슴처럼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힌 사나운 여인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극렬 신자로 왜곡된 신앙심을 전파하는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하였고 아들에게 편향된 사랑은 전처소생의 네 딸들에게는 홍련의 어미보다도 더 모질게 다루었다.


40세도 되지 않은 청상과부는 다시 재가하기에 딸린 자식들이 너무 많았고 지나온 마음의 상처가 너무 겁고 깊었다. 오로지 아들의 교육과 성장에 모든 것을 걸고 미국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나머지 삶에 치열하였다.


세월이 흘러 다섯 딸들을 다 출가시키고 드디어 아들의 결혼 차례가 되었다.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불면 날아갈까, 금쪽같은 아들에게 심성 좋고 높은 지성을 가진 완벽한 아가씨와 결합시켜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결혼까지 생각하며 사귄다는 아가씨가 중국 여자라는 것이었다. 언감생심 국제결혼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더군다나 말이 안 통하는 중국 여자라고 하니 순희 이모는 어이가 없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는 어머니의 발악에 착하고 효자인 아들은 그만 결혼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하자는 데로 순종하였다.


여러 곳에 중매를 넣어 지방에서 그래도 명망이 있고 학력을 갖춘 교양이라는 집안과 여러 차례 선을 본 결과 아들과 어머니가 어느 정도 만족되는 선에서 선택한 한 아가씨와 6개월여 서로 만나 보다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인생이 내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려나갔으면 좋으련만 그러질 못하였다.


서울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아들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고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과도한 사랑과 집착에 눈이 먼 시어머니와, 독립적인 생활을 바라며 시어머니와 거리를 두려는 와이프라는 두 여인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오래 고생하였다. 이혼까지 감수하겠다는 아내의  증오로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고  급기야 모자간의 인연을 끊을 단계까지도 악화되었다.


 본인도 어릴 적 아버지의 부재로 한이 맺혔는데 또다시 '내 아이들에게 그 고통을 지게 할 수 없다'는 오기로 이혼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부인과 아이들을 멀리 호주로 조기 유학시키고 아들은 장기적인 기러기 아빠 생활에 접어들었다. 이때 아들과 서울에서 살림을 합쳐서 어머니와 다시 표면으로나마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


이제 나이 70을 넘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보고 황혼의 시기에 접어든 때에도 순희 이모는 또 다른 불행의 그림자와 대면하여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산통보다도 더 찢어질 듯한 복통이 와서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증세는 호전되었으나 장폐색으로 원인으로 지목되는 1차 진단명이 '악성 중피종'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건축재료인 석면이 사람의 폐나 장으로 들어가서 30년 이상 잠복하고 있다가 악성 암으로 변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래서 현재는 석면 사용을 국제적으로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추측해 보면 그녀의 남편이 살아 있을 적에 2층 양옥집을 크게 지어 오래 살았는데 거기에서 석면을 섭취하지 않았을까 의심이 되었다. 그 석면이 노화에 의해 면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그녀의 소장을 막아버려 응급실을 찾았던 것이었다.


대수술을 통하여 장을 잘라내고 새로 이어 소통은 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이는 임기응변을 뿐 근본적으로 암을 제거하지 못하면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하며 잠시 희망을 가져 보았으나 하늘도 무심한 것, 이듬해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복이 불행을 가져오고 그 불행으로 인해 행복이 시작되는 윤회의 고리 속에 인생이   돌고 돈다고 불교의 연기법에서 말한다. 산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한다 해도 순희 이모에게 집중된 불행의 총량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이런 이유를 설명해보고자 동양 철학에서는 주역을 기반하여 당, 송의 명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사주와 팔자를 통하여 개인의 생로병사를 운명적으로 예측하고 분석할 수 있기에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미리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 없다고도 말하기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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