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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8. 2022

가난과 결핍의 시절에서 의과 대학 졸업하기


의과대학 본과 3학년이 된 1986년의 나는, 여름을 털어낸 가을 낙엽이 날리는 홍릉 길을 쓸쓸히 걷고 있었다.


학교에서 5 km 남짓  떨어져 있는  농협은행 청량리 지점을 다녀오는 길이 었다.


이번에 또 하숙비가 입금되지 않은 텅 빈 통장만  확인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내었다.


' 을 벌고야 말겠다!'


막막한 듯한 쓸쓸함 뒤에, 어떤 오기가 뜬금없이 솟구쳤다.

버스비 120원이 없어, 학교와 은행 간의 한 시간의 거리를 비참하게 걸어가며 저절로 드는 생각은, 각오를 넘어 외침처럼 느껴졌다.


궁핍한 가정환경과 맞지 않게도 나는 지방 도시, 마산에서 서울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나는 당연히 학비와 생활비의 부족으로 고난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학생으로 6년 동안 등록금은 면할 수 있었으나 나오던 10만 원의 생활 보조금이 끊기고 나니 나머지 본과 3, 4학년은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빈곤과 싸워야 하였다.


요즘처럼 과외가 가능하다면  방법이라도 있었을 텐데 군사정권에 의하여 아르바이트 조차도 금지된 시절이었고 학비는 오로지 부모형제의 도움이 없으면 학업을 계속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다 연속된 자취 생활로 피폐해진 몸을  다스리기  위해 한 달 12만 원하는 하숙을 시작한 시기에 집안의 돈은 더욱 말라 농촌에서 매달 그 돈을 송금한다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여, 매달 하숙비를 찾으러 가는 청량리 농협행은 마치 겜블링과 같았다. 청량리까지 타고 오는 버스비가 없어 친구에게 토큰을 빌려야 했는데, 매번 부탁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돈이 입금되지 않는 사태를 대비하여 왕복  두 개의 토큰을 빌리는 것은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토큰 한 개로 겜블링을 걸어 보는 것이었다. 입금된 돈을 찾아 나머지 토큰 한 장은 사면되니까.


그러나 그날은 겜블링에 패한 날이었다.


방향 없이 나부끼는 바람에 거리의 낙엽은 구석진 곳으로 일어났다가 쓰러진다. 그 낙엽을 밟고 처연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 없으면 불편함을 지나 처절한 빈곤의 고통을 매일 당해 내어야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찍  취직한, 고마운 여동생으로부터 송금받는 월 5 만원은 밀린 빚을 갚고,  나머지 조금 남은 돈을 쓰고 나면 매월 20 여일 정도는 동전 한 푼 없이 한 달을 견뎌 내어야 다.


값비싼 의학서적을 구입하는 것은 애당초 꿈도 못 꾸었고 복사라도 할라치면 돈이요, 노트며 족보며 돈이 들어가야 할 곳은 천지인데 마지막 10원짜리까지 쓰고 나면 결국 빌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2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인데 한계는 턱을 지나 눈 아래까지 올라와 숨을 막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한 자취생활이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까지 10년을 채우고 18년의 학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가는 이때에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나섰다.

내 여자 친구이었다.


촌티에다가 가난으로 풀 죽은  의대생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서울 아가씨였다. 한날은 나에게 무언가  건네주었다.


" 통장이야. 앞으로 여기에 생활비를 넣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해. "


순간 고마운 마음보다도 그 빈궁한 가운데에서도 자존심이 솟아올랐다. 아니, 자존심보다도 책임감이 앞서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미래를 약속해 주지 못하는 대생에게 도와주고 희생해준 여인이 종국에는 배신당하고 폐인이 되는  삼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솔직하게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족쇠처럼 구속되기가 싫었다.


" 그렇게는 못해! "


결연히 거절하는 나를 보고 그 여인도 한 번 더 재촉하지 못하고 통장을 집어넣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녀는 간접적으로라도 도와주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지금은 나의 아내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그 여인에게 가끔, 그때 왜 한 번만 권유했는지 타박해 본다. 이렇게 될 미래였으면 도움을 받고 그 고생을 좀 덜 할걸.


사회의 도움과 부모 형제의 지원과 한 여인의 헌신으로 우수한(?) 성적과 함께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의사가 되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올라서고 풍요로운 선진국에 접어든 현재의 대한민국이 대단하다. 자본주의의 단 열매를 따먹고 부자가 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의, 식, 주라는 기본 생활 욕구를 넘어 풍요 위에 결핍된 마음의 행복을 찾아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양지가 많으면 음지 또한 길어지는 법, 깊어가는 빈부 격차의 부작용 속에 지금도 학비나 병원비가 없어 속을 끓이는 이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돈이 신이요, 악마요, 무서운 괴물이다.


'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 말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웃고 만다. 이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돈만을 너무 쫓아가다 보면 불행을 부르는 것도 사실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

지지불태(知止不殆 )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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