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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9. 2022

손금

손금에 나타난 운명적 암시.


결코 미신을 믿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반복하여 되새기다 보면,  어떤 신호가 미래의 암시처럼 여겨지는 수가 있다. 우연히 그 결과가 실현되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믿어져 신앙이 되는 경우가 미신이라 할 수 있겠다.


나의 경우는 '손금'이 그랬다.


다른 점술에 비하여 비교적 쉽고 간단하여 어릴 적부터 손금 보는 법을 즐겨하였다. 깊이 없는 주술(呪術)로 주위 친구들을 놀려 먹기도 하였고 자연스레 손을 만지며 연애의 스킨십으로 유용하게 써먹었다.


생명선, 지혜선, 재물선, 출세선, 결혼선등으로 선이 흠없이 굵고 길게 뻗어 있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그 반대이면 나쁜 것이다. 제법 용하다는 농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터였다.


점괘라고 하면 조선시대, 명종(明宗) 때 활동하였던 맹인 점술가로서  홍계관(洪啓寬)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임금에게 불려 갈 정도로 그의 신점은 신통했고 대신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다 맞추어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하루는 임금이 항아리에 쥐 한 마리를 넣게 하고 홍계관을 불러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혀 보라고 하였다.


너무 쉬운 문제라 으스대는 홍계관을 보고 명종은 안 그래도 요사한 점괘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점쟁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임금이 물었다.


" 맞추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

" 목숨을 내놓겠나이다! "


홍계관은 여유만만하였다.


" 그것이 무엇이냐? "

" 그것은 네 발 짐승입니다. 낮에는 숨고 밤에 활동하니 고건  틀림없이 쥐입니다. "


그러자 같이 보고 있던 대신들이 탄복하였다. 자존심이 상한 임금이 다시 물었다.


" 그러면 쥐가 몇 마리가 들어 있느냐? "

" 네 마리이옵니다."


틀리게 대답한 홍계관에게 임금은 약속대로 참수를 명하고 말았다. 이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홍계관은 간수에게 뱃속에 새끼가 세 마리 있다고 하고 죽어 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임금은 쥐의 배를 열어보게 하였고 어미쥐는 세 마리의 새끼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차'하고 사형을 중지시키라는 명을 전달하였으나 이미 홍계관은 불귀의 객이 되고만 후였다. 그래서 아차산과 아차 고개가 생겼다는 전설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내 손금중, 생명선에 하자가 있었다. 길이로 계산하여 30세 초반에 해당하는 위치의 생명선 중앙에 검은 점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선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굵게 연결되어 있어 단명의 점괘는 아니지만 손바닥을 볼 때마다 왠지 불길한 미래가 그려지곤 했다.


' 나이 30 초반에 큰 병을 앓을 징조이니라! '라는 점괘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점괘 때문인 지는 몰라도 내 나이 31세에 폐결핵을 앓았다. 정형외과 레지던트 2년차이였을  때였다. 체중이 감소하고 극도로 피곤하였던 것이 밤잠 없이 일해야 했던 혹독한 레지던트 근무가 원인이라 생각했지 병이라 예상하지 못하였다. 1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직원 건강 검진에서 폐결핵이 진단되었다.  


건강검진 엑스레이 필름을 보던 방사선과 선배가 나를 호출하였다. 나의 우측 폐 상단을 가리키며 결핵이 의심된다며 다시 한번 큰 필름으로 재촬영을 하였다. 결과는 불행 중 다행으로 미니멀 결핵 (Minimal Tuberculosis)이라고 하는 초기였다.


과거에 치명적이었던 병들, 즉 천연두, 흑사병, 호열자 등의 인류 공적들이 소멸되어간 20세기 말에서도 결핵은 살아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감염자를 배출하고 사망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로와 영양 불균형, 수면부족 등이 겹치면 언제라도 우리 주변에서 결핵균이 잠복하고 있다가 감염되는 것이다. 예방접종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레지던트 수련은 그야말로 혹독했다.


모름지기  스파르타식으로 훈련받아야 한다는 정형외과 주임과장의  철학 아래 군사문화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병원으로 옮겨져 밤낮 없는 노동에 내몰려졌다. 우선 밥 먹을 시간이 없어 굶거나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빵을 얻어 때우는 일이 빈번했다. 보통 새벽 3-4시에 일이 끝나 숙소까지 가지 못하고 케스트 실 같은 창고에서 쪽잠을 잤다. 그나마 4년차 치프가 술을 먹이지 않는 날에나 조금 눈을  붙이고  아침 6시면 회진 준비로  서둘러야 했다. 1주일에 한번 정도 집에 가면 그야말로 숟가락을 들다가도 잠이 드는 정도였다. 병이 걸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2주일간 강제 휴가가 떨어졌다.  아니 병가(病暇)였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얼마나 정신교육이 투철했었던지 쉬어라는  주임과장의 명령에도 굳이 계속 일하겠다고 박박 우겼다. 실상은 교수회의에서 나의 결핵으로 타 직원들에게 감염 전파의 우려가 있으니 격리 차원에서 휴가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목숨 바쳐 일할 수  있다고 우겼던 것이다. 조건은 내과병동에 입원하는 것이었다.


2주일의 휴식은 달콤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1년간 결핵약을 중단 없이 복용하기만 하면 완치될 수 있는 정도였다.


덕분에 14년간 피웠던 담배도 끊었다. 내과 입원 중 몰래 피웠던 담배를 담당 간호사에게 들킴으로써 하는 수 없이 금연에 접어들었다. 아내가 헌신적으로 사 오는 박하사탕에도 도움을 받았다.


현재도 두고두고 아내의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 그때의 금연이다. 장모님께서 맞춰 온  장어 맛이 나는 뱀탕을 지겹게 먹어 본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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