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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7. 2022

가난한 자의 죽음

수술비가 없어 응급실에서 죽어간 한 환자 이야기


우리 인류가 동부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시작하여 75억 명의 인구로 불어나,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대략적으로 1000억 명의 생명이 죽어갔다고 한다. 이유 없는 죽음이 없고 그 죽음들에게는 수없는 사연들이 진실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의사 면허증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초임 인턴 시절에 만난 한 젊은 가장의 죽음도 슬픈 스토리를 남기고 잊혀 갔다.


의대를 졸업한 1987년, 그해 봄에 대학병원의 인턴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야말로 시퍼런 청춘이 살아 있는 27세 때의 일이다. 인턴이란, 1개월마다 여러 전문 과를 돌아가며, 의사 수업과 함께 1년간 근무하는 것이다. 그 단어가 의미하는 데로 병원에서 상주하며 근무하여야 하므로 당직을 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처음으로 배정받는 곳은 신경외과였다.  신경외과는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수많은 환자들이 24시간, 응급실과 수술실, 병동을 들락날락거리는 매우 힘든 과 중의 하나였다. 힙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친 지 한 달도 안 된 3월의 신경외과 인턴 2명은 보무도 당당하게 눈썹을 휘날리며 집에도 가지 못하고 열심히 근무하였다.


3월의 중반쯤의 어느 날 저녁, 당직을 서는 중, 응급실 호출을 받고 신경외과 2년차 레지던트를 따라 응급실로 내려갔다. 환자는 42세의 남자 환자로 동맥류성 뇌출혈로 의식이 흐린 상태로 119 구급대에 의해 실려왔다.


저녁식사 후 특별한 이유 없이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고 겁먹은 젊은 아낙이 눈물을 글썽이었다. 기관삽관을 하여 기도를 확보하고 혈압관리와 약물투여를 위하여 수액을 연결한 후 CT 촬영을 시행하였다.


 분석한 결과, 출혈부위가 뇌 기저부를 벗어나 수술이 가능한 부위라고 결론지어져 응급수술 준비를 하라는 지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술 후 완전하게 회복하기는 힘들지만 이미 진행된 뇌손상의 후유증을 장기간 재활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수술 준비를 중지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유는 원무과에서 환자 보호자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수술적 재정보증으로 연대보증을 서 줘야 할 친인척이 없었고, 수술을 원하던 부인은 찢어지게 가난한 달동네 출신의 빈자라는 사실을 원무과가 이미 파악해버린 상황이라, 수술 진행이 원무과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불쌍한 여인은 눈물로 호소해 보았으나 의료보험도 없고 수술 후 장기치료로 수천, 어쩌면 수억이 나올지 모르는 치료비 때문에 고생해본 원무과장이 강력하게 입원 초기부터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의료보험이 없는 국민도 많았고 사회복지가 허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오는 의료혜택이 형편없는 때였다.


"닥터 남! 모리분드 갔다 와"라고 4년차 레지던트 선배가 지시하였다.


모리분드 디스챠지(Moribund discharge)는 어떤 의학적인 기술로도 소생시킬 수 없는 상태의 환자를 집으로 퇴원시킬 때, 위로와 사망 확인의 차원에서 인턴을 동반하여 환자의 자택으로 가서 임종의 상태를 확인해 주고 돌아오는 퇴원이다. 


모리분드라는 생소한 단어의 의미는 '빈사 상태의 또는 소멸해 가는'이라는 뜻인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호주의 한 여인이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검사를 받아 보아도 도무지 그 병명이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 하기를, "병명을 발견해 주는 실력 있는 의사를 보내 주소서!"라고 하였는데 드디어 새로운 의사가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의사의 결론은 "She is moribund"라고 했다고 한다. 즉, 가망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병명인 줄 알고 그 명의에게 매달렸고 희망을 가지고 치료와 함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2년 만에 병에서 회복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도 그것을 병명으로 여기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리분드 퇴원은 의사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기에 그 일은 늘 인턴에게 배당되는 일이었다. 어떤 이는 먼 지방까지 갔다 오라기에 엠부백이라는 인공호흡기를 6시간이나 짜면서 갔다 온 후 손이 퉁퉁 붓기도 하였다. 보통 욕이나 먹지 않고 돌아오면 성공인데 가끔 국수 한 그릇 대접받고 오는 이도 있었고 재산이 좀 있는 보호자는 두툼하게 촌지를 주기도 하는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고 겁도 나는 일이라 걱정이 되었다. 내가 직접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거두어야  하는 일이다. 심장의 박동이 멈춘 사실을 담담하게 확인하고 사망선고를 내리는 일이 의사의 일인데도 마냥 불안하기만 하였다.


무엇보다도 살릴 수 있는 환자를 포기하고 집으로 데려가서 사망시키고 오라는 지시에 때 묻지 않은, 젊고 순수한 의사는 분개하였다.

3년차 레지던트에게 항거해 보았다.


" 선생님! 수술 진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


" 위에서 지시가 그러하니 할 수 없어 "


할 수 없이 나는 이미 의식이 없어진 환자가 누워있는 앰뷸런스에 올라 인공호흡기를 짜면서 출발하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그의 집은 동대문구 중계동이었는데, 집은 언덕 위,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었다.  차가 진입할 수 없어 운전기사와 함께 들것에 환자를 옮겨 흙길을 올라가야 했다. 힘을 쓰는 남자마저도 없어 엠부백을 부인에게 잠시 맡기고, 나와 운전사 둘이서 끙끙거리며 집에 도착하였다. 집에 들어서고 보니 방 한 칸에 아이 둘이 돌보는 이도 없이 찢어지게 울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어느 봄날의 밤에, 들여다보는 이웃이나 친척 하나 없이 철저히 세상에서 버려진 가족같이 보였다.


환자를 아랫목에 누이고 기관 삽관되어 있는 생명줄을 뺀다고 보호자에게 고지를 한 후 튜브를 뽑았다. 튜브를 뽑게 되면 자력으로 호흡을 할 수 없게 되고 3분 후부터 뇌사가 급격히 진행되어 결국 심장의 박동이 멈추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10분여를 기다려 동공확장을 확인하고,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괄약근의 이완을 확인한 후, 청진기로 심장박동을 들어 보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고요하였다. 시신에 청진기를 대보는 일이 흔하지 않기에 그 고요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경하였다.


"운명하셨습니다 "


사망선고를 하니 부인은 그제야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두 아이는 어미를 따라 더 크게 울었다. 수액줄을 빼고, 인공호흡기를 챙겨 들고, 몸을 비틀며 오열하는 불쌍하고 외로운 가족을 뒤로하고 서둘러 어두운 산 길을 내려왔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비분한 마음에 병원 앞 술집 앞에 내려달라고 운전기사에게 부탁하였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 듯 기사는 군말 없이 내려주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짧은 시간에 소주 두병을 들이켜고 늦은 밤 인턴 숙소로 향하였다.


운도 없이 그날 새벽에 응급수술이 잡혔다. 음주 사실을 숨기고 수술 준비를 하였으나 술냄새를 맡은 4년차 집도의로부터 욕을 들으며 크게 혼이 났다. 건방지게 인턴이 근무 중 음주를 하였다고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나중에 소상한 내용을 알고 있는 3년차 선배의 변호로 무사히 구제되었다.


아직도 깜깜한 밤을 만나면 그날 밤 중계동의 쓸쓸한 암흑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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