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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Sep 04. 2022

왕따

'왕따'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왕따'라는 단어가 생기기 한참 전에 나는 왕따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집단 따돌림...


아마도 이것은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우리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무리를 지어 사회를 이루었던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수백만 년 전부터 인류의 운명과 함께 존재해 왔을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확신하는 것 같다. 생물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두 가지, '생존''종족번식'이라는 대명제에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집단의 생존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은 마땅히 제거되거나 따돌림이라는 방법으로 순응시키거나 였다.


그러나 나에게로 향한 왕따는 내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억울했다.


억울했다! 억울했다! 억울했다!


왜냐 하면 나의 케이스는 나 자신의 결함보다는 주위 환경의 급변으로 야기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를 항변하기 위하여, 시골 중학교에서 지역의 명문, 마산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야기를 먼저 하여야 한다.


지루할 수 있겠지만 먼저 양해를 구한다.


1970년대 중반에,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하여 서울, 부산, 광주 등의 대도시에 있던 초 명문고등학교들은 이미 평준화가 되어 소위 '뺑뺑이' 학교로 전락되었다. 이는 과도한 사교육의 부추김과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군부 정권이 강제하였던 정책이었다. 그로 인해 기라성 같았던 경기고등학교나 부산고등학교는 명성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아직 대전, 전주, 마산 등의 중소 도시는 입학시험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지방의 수제들 뿐만이 아니라 평준화가 진행된 대도시에서도 역으로 명문고를 찾아 응시하는 바람에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지금의 기억으로 200점 만점에 192점이 커트라인으로 시골 중학교에서는 겨우 1명, 또는 2명 정도가 합격하는 수준이다.

 

그 당시 대전고, 전주고, 마산고 수재들이 서울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선진국 진입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평준화는 계속 진행되어 나는 마지막 시험 기수로 1978년, 마산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부산, 마산, 대구, 울산 등 경상도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준재들은 마지막 명문고를 향하여 다 모였으니, 그 학교에 합격하는 일은 시골 중학교의 명운이 걸린 일일 뿐 아니라 합격자의 지방과 가문에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밀양군 내에 있는 한 시골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전교생이 1,500명이나 되었다. 우리 중학교에서 9명을 선발하여 시험을 치렀으나 1명 합격하는데 그치고 말았으니 그 1명이 영광스럽게도 나였다. 그러니 나의 오만과 엘리트 정신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집안의 경제가 도시의 인문고를 보내기엔 불가하였으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국비로 산업 일군을 길러내는 금오공업고등학교로 진학시키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담임과 교장선생님이 아버지와 면담하였다. 


"총명한 아이를 평생 손에 기름 묻히고 살게 할 거요?"


협박에 가까운 선생님의 설득으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향할 수 있었고 그해, 우리 중학교는 겨우 한 명의 합격자를 낼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하던 날 어머니의 떨리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날은 아들의 고등학교 시험과 발표를 위해 수일간 마산의 이모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이모는 마산에서 양옥집과 자가용으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데, 정작 어머니는 고된 농사에 끼니 걱정하며 사는 신세였다. 자존심 하나로 버티기에는 세상은 녹록하지 못하여 잘 사는 동생에게 급전을 빌리기까지 하였다.


MBC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합격자를 발표하는 시간에, 떨리는 가슴으로 모두 흑백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합격자 명단에 드디어 내 이름이 올라가자 가장 놀라는 이는 어머니가 아니라 이모였다. 눈을 크게 추켜올리면서,


'네가 어떻게...!' 하는 표정이었다.


마산에서 오래 살아온 이모의 생각에 조카의 합격은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다. 설마 시골에서 공부 좀 잘한다고 해봐야 마산 고등학교는 어림없을 거라고 미리 짐작하였던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손을 잡으며 장엄하게 말했다.


"그래 잘했다! 고생 마이 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르고 도시의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생활이 얼마 가지 않아 난관에 봉착하였다.


왕따였다.


따돌림에는 이유가 있다 한다.


나의 이유는 무엇일까? 초여름에 들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시골 촌뜨기가 도시 아이들 앞에서 온갖 잘난 척은 혼자서 다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로서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수업시간, 누군가는 선생님과 학생 간의 대화에 솔선수범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대게는 반장이나 반에서 1, 2등 하는 학생이 손을 들어 대답하여야만 진도가 나갈 수 있었다. 아니면 선생님의 짜증에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 될 수가 있다.


나 또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수년간 몸에 배이도록 열심히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난다 긴다 하는 학생이 모여있는 명문 고등학교까지 나의 습관이 이어진 것이다.


초기에는 나의 명석한 대답에, 내가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실력인 줄 알고 학생들이 나에게 문제 풀이를 부탁할 정도였다. 얼마 가지 않아 나의 성적이 알려졌고 3, 40등을 왔다 갔다 하는 성적을 보고 도시 학생들이 나를 비웃었다. 그때부터 맹랑한 촌뜨기에게 도시 아이들의 따돌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 똑똑이 '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나의 별명들 에서 가장 치욕적인 별명이다.


"어이! 똑똑이! 잘해봐. 섀캬!"


심지어는 2단 옆차기를 내 지르기도 했다. 3명의 도시 아이가 주동이 되고 나머지 아이들은 자동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는 미미한 나의 인생에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쉬는 시간에는 급우들을 피해 구석진 곳이나 먼 복도에 혼자 우두커니 따로 지냈다.


 그때 염치없게도 외삼촌의 신혼집에 기숙하고 있었다. 신혼으로 마냥 행복에 들떠 있어야 할 외삼촌 부부  세방에 개밥에 도토리처럼 몸 둘 곳이 없었고  학교는 학교대로 정을 붙일 수가 없었으니 나의 사춘기는 또다시 병들어 갔다.


그러나 반 급우 60명 중 58명이 나를 따돌렸지만 유일한 1명, 나의 짝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감싸 주었다. 아직도 그 이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쯤 그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진짜 할 일 없으면 국회의원이나 하지 뭐"라고 웃던 그였다.


겨우 이 친구에게 의지하며 고등학교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한 학년을 올라가면 대부분의 학급 동료가 바뀌어 나의 정체를 모르게 된다.


2학년이 되자 5, 6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이때부터 수업시간에 절대로 손을 들지 않고 묵묵하게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자 서서히 친구가 생기고 성적조차도 조금씩 향상되어갔다. 당시 600명의 전교 학생 중 100등 안에만 들면 서울대학교 입학은 무난할 정도였다. 100등 안으로 몇 번 들어가니 공부에도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났다.


뜨거운 맛을 보고서야 방법을 찾아내었고 친구가 생기면서 학창 시절의 생기를 찾아 나갔다. 그때 친하였던 고교 친구가 지금 고교 동창이다.


집단 따돌림, 왕따에 대한 해결은 참 어렵다고 본다. 부모가 나서고, 사회가 나서고, 공권력이 나서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한때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다만 나의 경험을 통해 첨언하자면, 부모나 제삼자가 개입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학교를 믿고 당사자에게 용기와 관심을 꾸준히 주면서 스스로 헤쳐 나가게 도와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얼추 40년이 지난 노년의 나이에도 고등학교 1학년 동문 친구를 만나면 경계심부터 드는 것을 숨길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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