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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Sep 01. 2022

좋은 선생님, 나쁜 선생님

짧은 시기에 최고의 선생님과 최악의 선생님을 만나다.


짧은 시간,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사이에 최고의 선생님과 최악의 선생님을 만났다.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은 초등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신○○ 선생님이었고 최악의 선생님은 중학 1학년 김○○ 기술 선생님이었다.


선생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먼저 태어나 살아 본 사람' 또는 '먼저 이 세상에 온 사람'이겠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세월의 변색을 받다 보면 뜻은 함축과 왜곡을 거쳐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간다. '학문적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존경받을 만한 사람', '관직의 전임자'등으로 많이 불려 왔다. 이는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도 같은 뜻으로 통하는데 고대 사회부터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선생이라는 말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성리학이 들어오기 시작한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교육자에게도 선생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데 과거 강사, 훈장으로 말하다 근, 현대에 들어 교사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물이 있다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막강한 이 있다. 인류를 움직인 위대한 위인조차도 그를 가르친 선생님이 없었다면 존재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짧은 시기에 만났던 두 선생님을 기억해본다.


먼저 좋은 선생님인 초등 6학년 신 선생님이다.


그는 40대 초반으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대머리가 되어가는 앞머리를 가리기 위해 옆머리를 길게 넘긴 분이었다. 피부가 고왔고 깊고 검은 눈동자로 약간 비음을 내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순환근무 때문인지 도시에서 시골 초등학교로 전근 왔다. 남, 여 각각 1개 반인 학교에 일부러 힘든 6학년 담임을 자원하여 나의 선생님이 되었고 어린 나의 눈에도 의욕이 넘쳐 보였다. 학급 반장인 나에게 긍지와 책임감을 실어주었고 전교 회장을 겸하도록 하여 아침 조회에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께 '차렷, 경례'를 시킬 정도로 빛나게 하였다.


시골 어린이들에게 큰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서울 수학여행을 1년 동안 준비하여 큰 프로젝트를 완수하였다. 덕분에 처음으로 개통한 서울 지하철 1호선도 타 보았다.


그리고 시골 촌부들을 설득하여 보이 스카우트에 가입하게 하였다. 최소의 회비와 6.25 전후에 폐기된 군용 보급품을 재활용하여 보이 스카우트 잼버리에 참가시키고 새로운 과외 활동의 충격을 시골 어린이들에게 선사하였다.


겨울 방학에 얼음치기와 구슬치기 대신에 학교에 나와 보충 수업을 시켰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과외 수업이었다. 그때 처음 영어 알파벳을 배웠다. 신 선생님은 바쁘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가끔 반장인 나에게 수업 진행을 맡겼다.  그때 알파벳과 발음기호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힘들어 직실을 오갔던 기억이 난다. 그 덕분인지 읍내 중학교에서 치러진 반편성 입학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졸업식에서 6년 개근상과 교육감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도 선생님의 자랑이자 학교의 자랑이었다. 전에 없었던 부상으로 신 선생님이 고집하여 스테인 레스 고급 식기를 어머니에게 안겨 주었다. 6년을 지각 한 번, 결석 한 번 없는 나를 키우신 어머니가 대단하다고 '장한 어머니 상'과 함께 은빛 찬란한 식기를 받은 것이었다.


사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개천에서 용이 난 것처럼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형외과 의사가 된 것은 모두 신 선생님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나쁜 선생님에 대하여 기억하기 전에 궁금증이 생긴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선생님들 중에 좋은 선생님이 더 많을까, 아니면 나쁜 선생님이 더 많을까?


아마 각자의 대답이 다르겠지만 내 개인적 의견은 안타깝게도 나쁜 선생님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두 번째 선생님은 1학년 1반 김 선생님이었다.


새로 입학한 읍내 중학교는 한 학년이 8개 반이나 되고 전교생이 1500명이나 되는 꽤 큰 학교였다.


1학년 1반 담임이자 기술 선생님인 김 선생님은 50대 중반으로 얼굴이 검고 주름살 많았으며 인상이 어두웠다. 행동도 어눌하며 빠진 이빨 사이로 말이 새어 약간 말을 더듬듯 하였다.


그는 읍내 아이들을 제치고 전교 1등으로 입학한 나를 이유를 막론하고 반장으로 지목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반장이란 긍지와 신뢰를 실어주는 학습의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잔 심부름과 잡일을 도와주고 교무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받아주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였다.


인기 없는 과목의 선생에다가 어눌한 행동에 따른 무능력의 결과로 교장에게 깨지는 날이 많아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수도 있었다. 술을 먹는 일이 많아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오래되어 힘들었던 기억은 다 사라졌지만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네놈은 반장이 되어가지고 지금에야 나타나!"

'빠~악'


순간 눈이 번쩍 하였다. 출석부로 나의 머리를 내려쳤다. 녹색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큰 출석부였다.


"너는 본보기로 지각이야" 하고는 검은 얼굴을 붉게 씩씩거리며 출석부에 지각 표시를 하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유일한 한 번의 지각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요즘 같으면 용서를 빌거나 부모가 찾아가서 전말을 져보거나 하였을 텐데 그때는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던 시절이라 결국 12년 개근이 아닌 정근이라는 기록에 만족하여야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주말 동안 여름 태풍이 지나가면서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고향 마을이 낙동강 인접 지역이라 강물이 불어나 홍수가 났다. 자취를 하던 나는 주말에 집을 찾았다가 홍수로 고립되고 말았다. 하루에 2번 오가던 완행 버스는 물에 잠긴 비포장 도로 때문에 당연히 운행 취소되었고 학교까지 8km, 20리 길을 산허리를 돌아, 돌아서 학교에 도착하였다.


아침 8시에 출발하여 12시 정오쯤, 천신만고로 선생님을 만났다. 홍수로 지각한 학생이 나뿐만 아니라 반 학생의 반수나 되었는데도 나만 대표로 두드려 맞고 지각까지 그어진 것이었다.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지각한 것이야 사실이지만 그의 감정적인 행위와 충동적인 행동이야말로 제자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길도 없는 산으로 걸어서 학교에 도달한 제자에게 조금이라도 역지사지의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 흘린 그날이 아직도 억울하다.


그 후로도 많은 선생님을 통해 학문을 배우고 지혜를 닦아 왔지만 60명이나 되는 학급에서 선생님과의 교감은 멀어져 갔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었다.


좋은 선생님과 나쁜 선생님은 어떻게 다른가?


정말이지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제자의 존감을 높여주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고 자존감을 짓밟는 선생님은 나쁜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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