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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Jul 31. 2022

고향 친구

요절한 고향 친구 이야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87년에 발표된 이문열의 소설이다. 엄석대라는 인물을 통하여 권력의 속성과 허구를 멋지게 그려낸 중편소설이다.

나의 고향 친구들 중에서도 엄석대와 같은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전후, 베이비 부머 세대의 마지막쯤인 1962년생들이 우리 마을에서도 태어나 남자아이만으로도 11명, 축구 한 팀이 될 정도로 농촌인구가 많았을 때가 있었다. 그 친구는 체구도 크고 힘이 쎄 항상 '대장'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그냥 골목대장의 수준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권력과 위상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같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그 권력의 향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권력의 무게는 단지 힘과 용기만이 필요한 시기에서 '공부'라는 지혜가 첨가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항상 1등을 하여야 하는 그는 학교 성적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학급에서 1등을 하며 반장으로 담임선생의 기대와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나는 한 때 그의 똘마니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놓아줄 인간이 아니었다. 학교를 가고 오고 하는 나의 시골길은 거의 항상 외톨이였다. 나머지 아이들을 조종하여 나를 '왕따'시키는 일이 유일한 그의 해법이었다. 처음에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자주 왕따를 당해보니 만성이 되고 오히려 그에게 충성할 일이 없어 홀가분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가끔 다른 아이를 왕따 시키려고 나를 끌어 들일 때는 잠시의 평화와 권력의 안락함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외톨이 시절을 받아들이고 견뎌내었다. 왜냐하면 나는 공부가 재미있었고 든든한 담임교사의 후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왕따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악몽인지 알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철저하게 충성을 맹세하던 제2인자가 대장에게 잘못 보인 것이었다. 아이들은 대장의 명을 받아 최초로 그를 왕따 시켰고 이틀을 초조한 외톨이로 배회하다가 학교를 결석하고 스트레스로 밥도 먹지 못하였다. 손이 귀한 외아들이었기에 부모를 통하여 담임교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고, 우리를 면담하고 화해시키기 위해 교실에 남았다. 그 자리에서 그 이인자는 펑펑 울었다. 강제로 시키는 대장의 악수에 감격하고 고마워서 정말로 펑펑 울었다. 선생님 앞에서 진정으로 사과하는 듯한 대장의 엷은 미소는 담임교사의 관심거리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쉽게 아이들을 굴복시켰지만 나만은 어쩔 도리가 없어 세월이 흘러갔다.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지식이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여도 전교에서 1등 하는 나를 따라 잡지는 못하였다. 전교에서 2등까지는 따라왔지만 마산에서 치러진 명문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학시험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는 시험에서 떨어져 후기 고등학교로 가고 나는 혼자서 당당하게 합격하였던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그는 나를 지배하던 시대에서, 도달하고 싶은 하나의 목표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내가 그의 우상이 된 것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연애를 하고 사업을 하여도 그는 항상 성공의 잣대에 나를 얹어 보았다. 그의 눈으로 본 나는 빛나는 의과대학생이요, 서울 사람이요, 의사의 인생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나를 넘어 먼저 성공하였다. 수산업을 하던 장인의 도움을 받아 수산물 중개업을 하여 큰돈을 벌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고 전국에 지점을 5개나 열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였다. 인턴, 레지던트의 적은 월급으로 삶을 꾸려가던 나보다는 먼저, 자본주의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것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만만하였고 사장님으로 성공한 그가 대견하였다.

그러나 잠재된 폭력성과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모한 본성은 불행을 몰고 왔다. 아들 둘을 낳고도 시댁과 고향 친구들을 경멸하는 아내와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술만 취하면 가게 앞의 차를 부수는 등, 타인과의 시비로 경찰서를 자주 들락날락하였다.

내가 정형외과 의원을 개업하여 정신없이 일할 때쯤 그의 사업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축구하다 다쳤다면서 나를 찾아왔다. 아킬레스 근육부 파열이었다.  처음 찾은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하여 다시 친구에게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아킬레스 인대부 파열은 반드시 수술하여야 하지만 근육부 부분 파열은 깁스만 해도 충분하기에 1주일 계획으로 입원을 시켰다. 그런데 3주가 지나도록 퇴원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비밀이 있는 듯하였다. 지방에 여러 지점을 둔 사장이 한가롭게 한 달 이상을 병원에서 있는 것도 이상하고 면회 한번 오지 않는 친구의 부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깁스를 풀고서야 퇴원하였고 장기 입원 이유가 보험금을 타 내기 위해서였을 정도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나중에 한번 더 입원할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체구도 큰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쇄골이 부러진 것이었다. 이번에도 수술할 뻔한 아들을 8자 고정법 하나로 간단하게 치료해 주었다. 아들이 입원해서야 그의 아내를 한번 볼 수 있었다. 거의 10년 만이었다. 고향 친구와 나 사이에 큰 간격으로 한 여자가 있음을 다시 절감하였다.

병원을 잠시 쉬고 아이들 공부를 위해 미국에 살고 있을 시절,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대장'이 아내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19층 아파트 베란다를 뛰어내려 자살하였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사업부도와 생활고로 극렬하게 부딪히던 부부싸움 중에 보란 듯이 뛰어내려버린 것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유언장 하나 없이 자살한 것이다. 충동적인 그의 성격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갑자기 한국으로 갈 수 없어 지인에게 조문을 부탁하고 조화를 보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그 후로 그에 대한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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