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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01. 2022

버스 안내양

추석 귀향길 뇌출혈 버스 안내양을 도운 이야기


살아오면서 착한 일을 한 기억이라곤 별로 없다.

어린 시절을 빈곤과 함께 성장하다 보니 심성도 빈곤하지 않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길가에 행인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어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은 지금의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 놀란다.

그러나 20대 시절 나는 뜨겁게 살아 있었다.
1982년 가을, 추석 귀향길에 고속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위에  있었다. 어렵게 차표를 구한 40여 명의 승객과 운전사, 그리고 버스 안내양이 구미 근처를 무심하게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좌석열의 중간쯤에 창가에 앉아 명절에 만날 고향 친구들을 생각하며 조금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서 여인의 신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악! 머리 아파!"

머리를 반쯤 들어 엉거주춤 일어나 앞을 보니 운전석 오른쪽 입구의 조그만 보조석에 앉은 안내양이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앞에 앉은 승객들 조차도 달리는 버스 주행속도의 관성력처럼 침묵하고만 있었다. 불현듯 내가 나서야 하는 강박증이 솟아났다. 미래에 의사를 목표로 하는 의과대학생이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일어서야 한다는 마음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분연히 일어나 좌석 중앙 복도로 걸어 나갔다. 안내양은 벌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고 갓길에 차를 세운 운전사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왜 그래? 왜..."

연휴에도 쉬지 못한 20대의 불쌍한 안내양을 복도에도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A, B, C, D를 속으로 되뇌며 관찰하였다.

"뇌막염인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생임을 밝힌 후 나름대로의 진단을 내리고 빨리 큰 병원으로 후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숨은 쉬고 있으므로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확보하여 빨리 응급실로 향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운전사는 만석으로 내려가고 있는 승객들의 원성 때문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하였다. 순찰 중이었는지 아니면 누가 연락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환자를 순찰차에 옮기기로 하였다. 경찰은 보호자가 같이 가야 한다 하여 누군가 동행하기를 요구하였다. 운전사는 목적지까지 운전을 마쳐야 하고 아무도 나서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일찌감치 나선 내가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운전사에게 나의 짐을 부탁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고속도로 순찰차량의 뒷좌석에 안내양을 비스듬히 누이고 기도확보를 위해 머리를 무릎에 받혀 응급실을 향해 출발하였다. 드디어 환자는 토하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기도가 막히지 않게 오물을 손으로 받아내는 와중에서도 앞 좌석에 앉은 40대의 경찰은 카시트가 더러워진다고 투덜대는 매정한 인심에 경악하였다. 구미의 한 종합병원에 도착하여 환자를 옮기고 있는 중에도 그 경찰들은 토물에 더러워진 카시트와 바닥 청소에만 몰두하였다. 구질구질한 가운을 입은 30대의 응급실 담당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반자로서 나의 인적 사항을 적어 주고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는 응급실 문을 나섰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 내었다는 뿌듯함은 잠시이고 구미에서 고향인 부곡온천까지 내려가는 일이 큰 일이었다. 주머니에는 빠듯한 차비밖에 없고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무지의 타향에서 더군다나 차편 구할 길 없는 민족의 명절, 추석 연휴가 아닌가!  물어서 물어서 시내버스로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 천신만고 끝에 표를 구하여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해가 방금 진 뒤의 늦은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4시간이 더 걸린 셈이었다.
사무실에 들러 내 짐을 찾으니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누군가 나타나서 선반에 놓여있는 짐을 내주었다. 그때서야 수고하였다는 한마디를 듣고 나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국가 경제 개발의 드라이브를 지나 민주화의 열망이 몸부림치던 80년대 초에는 인권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운전사와 40여 명의 무리는 목표의 완성, 즉 생산이 우선되었던 것이었다. 버스는 곧장 응급실로 향하여야 했었다. 경찰은 카시트 보다도 소녀의 목숨이 먼저이어야 했다. 운전사는 모든 일을 상사에게 보고하고 사장은 소녀의 헌신에 보답하여야 했다. 그 시절 그때는 그렇질 못하는 시절이었다.

3개월 후, 기말고사로 바쁜 나에게 50대의 중년 부부가 찾아왔다. 그 안내양의 생사가 궁금하던 나에게 부모가 직접 소식을 전했다. 진단은 '지주막하 출혈(Subarachnoidal Hemorrhage)',  내가 의사도 되기 전 내린 진단은 결국 틀렸고 그 여인은 불쌍하게도 2개월여 뇌사상태로 생사를 헤매다 결국 영면의 세계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산재 혜택을 받지 못하여 억울해서 현장을 목격한 나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해 나를 수소문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내용을 들어 보니 업무 중에 일어난 일이기는 맞기는 하나 본인이 가진 질병이 우연히 복무 중에 생긴 일이라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하고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지주막하 출혈은 '꽈리(Aneurysm)'라는 뇌혈관 기형이 아무런 증세 없이 존재하다가 고혈압이나 스트레스 등의 여러 이유로 터지면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하거나 평생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환이다.

부부는 뇌출혈과 업무의 연관성을 찾아내기 위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날 운전사와 안내양이 싸우지는 않았는지, 승객과 말다툼이 없었는지 물어보았지만 내가 본 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하니 실망하는 빛이 선 연하다. 짜장면 한 그릇을 대접받고 헤어진 다음 그분들에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고 부모가 보상받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만약 그 문제로 법정 소송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그날 본 진실 그대로 증언할 의향도 있었지만 이쪽저쪽도 나를 원하지 않은 모양이니 부모가 포기하였는지 원만하게 합의를 보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지금이야 당연히 산재보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판단되지만 그때는 그런 불행하고도 억울한 사정이 수도 없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래도 말로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여야 한다면서도 한 여인을 죽음을 두고서 반응하는 사람들의 싸늘한 행위를 목도하면서 의사의 수업을 마치고 정형외과 의사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에야 이기심과 욕심으로 오염된 나의 고착된 심성에 다시 그런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지면 무시하고 지나갈까라고 생각해 보면 확신이 없다.

그러나 본성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
아무리 의식이 말려도, 아내가 말려도, 삭막한 사람들의 인심이 말려도 나도 모르게 뛰어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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