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골프를 한다면?
공자, 노자, 손자, 한비자의 골프
만약 공자와 손자, 한비자, 그리고 노자가 만나 4 썸을 이루어 내기 골프를 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즐거운 상상이다. 지기 싫어서 승부에 집착하는 범부 중생의 소인배가 아니고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기에 우리와 다른 특별한 승부를 겨루기를 기대해 본다.
먼저 공자의 플레이를 살펴보자.
측은지심, 즉 인으로 골프를 대할 때 상대의 멋진 플레이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아쉬운 실수는 어진 마음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수오지심, 즉 의로서 골프를 대할 때 멀리건 샷을 기대하지 않고 정직하게 스코어를 기록하며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사양지심, 즉 예로서 골프를 대할 때 상대의 샷을 진중하게 기다려 주고 설령 상대가 스코어를 속이더라도 예로서 눈감아 줄 것이다. 끝으로 시비지심, 즉 지로서 골프를 대할 때 골프의 목적이 상대를 이기고 돈을 따는 것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요 승부에 지고서도 친구를 얻는다면 큰 이익이므로 오히려 최선을 다하고 지는 것이 크게 이기는 것이라는 지혜로 승부에 집착을 버릴 것이다.
그러면 골프를 대하는 손자의 마음은 어떠한가?
상대를 모르고 나도 모르면 백번 싸워도 백번 지는 것이며 나를 알고 상대를 모르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지며 나도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상대의 골프 핸디가 나보다 낮으면 도전하지를 말고 상대가 나보다 못하면 도전하기를 부추겨 먼저 승부를 이겨 놓고 플레이를 한다. 실력이 비슷한 상대에게는 상대가 나보다 더 잘 친다고 칭송을 하여 교만에 빠지게 한 다음, 핸디를 받아놓고 골프에 임한다.
골프는 이기는 맛이라 아무리 상대가 헤매고 있어도 컨시드를 주지 말고 흥분하여 샷을 망치기를 유도한다. 너무 격차가 벌어지면 적당이 모르게 실수를 하여 상대의 도전의지를 꺾지 말아야 한다.
한편, 한비자야 말로 골프에서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가 아닐까?
한비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이 성악설에 기초하여 태생 때부터 이기적이며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나의 욕심을 먼저 채워야 적성이 풀리는 그러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강력한 법과 채벌로서 다스리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하고 국가의 질서가 서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법가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으로 유가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았지만 서구 유럽의 마키아밸리즘에 상응되는 공감대가 있어 동양사상의 한 주류로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한비자의 플레이는 냉정하다. 멀리건 샷은 결코 없으며 더블파 이상도 철저히 기록함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타인에게도 철저하게 페널티를 요구한다. 오비나 해져드도 볼이 빠져들어간 입구에서 정확하게 벌타 드롭을 하고 상대방의 치팅에 준엄하게 꾸중하여 교정함으로써 골프의 친교를 망칠 수가 있다.
아무도 한비자와 같이 골프 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노자는 어떠한가?
원래 골프의 도는 눈에 보이지 않되 거기에 있고 귀에 들리거나 만져지지 않아도 항상 존재하므로 골프라 할 것도 없고 골프라 하지 않을 것도 없다. 물이 아래로 흐르고 남이 싫어하는 곳으로 의연히 흘러가는 상선약수의 도를 가지고 골프를 하여야 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딱딱한 것을 이기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골프를 치는 듯이 치지 않는 듯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어느덧 승부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연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과연 어느 사람이 진정한 골퍼로서 라운드에 임하는 것일까?
무수한 사람과 썸을 이루며 18홀 골프를 접해왔다.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이 창조한 스포츠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골프를 대할 때 그 사람의 내면이 골프를 통해 표출되는 장면을 많이 보아온 것이 사실이다. 분노하는 사람, 좌절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억제하는 사람, 등등의 동반자를 바라보며 나는 어떤 종류의 골퍼일까 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진정 골프를 즐기고 이것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휴식을 찾을 길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