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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Oct 10. 2016

'삶'과 '죽음'사이 아이러니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찾은 '아이러니'

아이러니(Irony)


'아이러니하다.'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굳이 해석해보자면 '모순', '부조화' 정도가 될 정도의 이 단어는 무언가 맞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이 그대로 자리를 잡아버린 모습들이다. 그것들은 잘못됐다기보단, 그냥 그대로 어딘가 어색한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아이러니들은 해결되야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해결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설명조차 모호해지는 이 단어를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당들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모습의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처럼 말이다. '데이비드 에이어'감독의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일명 '자살 특공대'로 불리는 '악당'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만들어 거대한 악들을 상대하기 위한 팀으로 꾸린다. 즉, '맞불'작전을 사용하는데 그들을 이용한 것이다. 영화에서 어떻게 '악당'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떠한 아이러니한 모습들이 담겨있는지 살펴보자.


하지만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고,
그 약점을 이용할 수 있지요.


국장 '아만다 윌러(비올라 데이비스 분)'는 또 한 번 위험이 찾아올 때, 말 그대로 '막 쓸 수 있는' 팀을 만드려 했다. 그들에게 '악인'들은 좋은 먹잇감이고, 수감 중이거나 수중에 있던 여러 악당들은 그 혜택 아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모으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단지 '약점'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이는 악당들의 약점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가족', '사랑', '실수', '신체적 결함' 등등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에겐 약점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영화에서 보여줬던 것 중에 하나만큼은 소중하게 또는 드러내고 싶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삶'이란 약점을 현실 속에 매달아 놓고, 그 가운데 '이상'속에서만 살지 못하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그 약점은 우리를 목표를 갖고 나아가게 함과 동시에 우리를 가둬놓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악당들이 그랬고, 현실의 우리가 그렇다. 다만, 그 목표로 다가가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결코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날 위해 죽을 수 있어?
그건 너무  쉬워. 나만을 위해 살 수 있어?


'조커(제러드 레토 분)'와 '할리퀸(마고 로비 분)'의 대화는 이 세상의 것을 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미치광이들의 대화'라기 보단 '현실의 것을 초월한'듯한 대화들이었다.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에는 가벼운 농투 안에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조커는 할리퀸에게 묻는다. '날 위해 죽을 수 있어?', 할리퀸은 대답한다. '네' 조커는 다시 묻는다. '그건 너무 쉬워. 나만을 위해 살 수 있어?', 다시 대답한다. '네'


이 짧은 대화 안에서 그들은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죽어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다. 그 누구든 결과는 '죽음'이지만 누구 하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지, 그것을 '죽어간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조커는 '사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아닌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고난과 역경을 '죽음'이란 결과가 아닌 '삶'이란 과정 속에 담을 수밖에 없고, 우린 어렵기만 한 세상 속에서 '약점'들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잠에서 깨어 하루를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보이는 악당들은 그들의 '죽음'그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단, '죽음'이 찾아왔을 때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오히려 더 큰 두려움을 보였다. 적 또한 그들의 약점으로 이용한 것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 보단, '죽음'이 가져갈 소중한 것들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에스프레소 머신!


그들은 결국 세상을 구해냈다. '자살 특공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정말 목숨을 다하여 싸웠고 승리했다. 악당들에 의해 구해진 세상은 어쩌면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웅 취급을 받던 전작의 여느 '히어로물'들과 다르게,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감형 10년'과 '딸아이를 보는 것', '에스프레소 머신', '케이블 방송'과 같은 소소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들을 원하는 '악당'들의 모습에서는 그들의 '악당'이라는 칭호가 무색해질 정도로, 친근하고 한없이 소박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그들이 모일 수 있었고 세상을 구해낼 수 있었던, '약점'이란 것을 우리와 달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악당'들의 잔혹함을 내세우기보단 그 안에 그들의 '인간'의 모습들을 내세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이것은 결코 영화가 '악당'들을 단순 옹호하는 것이 아 그들 또한 '인간'이란 범주안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이고, 그 안에서 우리들과 공유하는 면모들을 통해 '살아간다'라는 것에 대한 정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 '데드 샷'의 시점으로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는 자신의 딸'의 환상을 앞에 두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쉬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렵게 살아가는 것처럼, 약점들에게 지배당하지만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악당'들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아이러니들 사이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이 세상 속에서 할리퀸의 목소리로 '받아들여'라는 말이 다소 잔인하게 머릿속을 울리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앞날이 놓여있는 것인지 모르기에 동시에 어떤 앞날이라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계속 감옥에 갇힐지, 조커의 도움으로 탈출할지, 딸아이와 다시금 같이 화목하게 살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삶' 속에 있는 바로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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