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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Feb 10. 2017

'다시'라는 무게

영화 '재심'을 보고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다시 한다'는 것은 했던 일을 되풀이해서 한번 더 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간단한 게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요리, 시험, 연애, 사랑 등등 세상의 모든 것에서 다시라는 것이 적용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쉽게 재도전 버튼 한 번으로 그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라는 것은 언제나 무게를 지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겐 '뭐 또다시 하면 되지'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과거의 이력이 양분이 되어 불안의 씨앗을 꽃피워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릴 만큼의 지독함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시라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건 한 남자가 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에서는 억울하게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10년의 복역 끝에 소년을 잃어버린 주인공 현우(강하늘 분)가 명예와 금전적인 욕망을 얻기 위해 접근하는 변호사 이준영(정우 분)의 이야기를 통해, 재심을 통해 자신들의 다시를 행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10년을 빼앗아간 법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던 현우와, 의뢰인이 아닌 돈을 보고 있던 준영은 서로 어긋나 있는 모양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는 겁니다.


그들이 다시 법정에 서기 위해서 하는 일은 순탄치 많은 않았다. 준영은 가족들을 뒤로한 채 도망쳐 지푸라기를 부여잡은 변호사였고, 현우는 누명을 쓴 뒤 10년의 복역 끝에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는 살인범일 뿐이다. 솔직해지자면서 변호사를 돈을 위한 직업으로만 생각하는 준영의 눈에 현우는 이미지를 위한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재심을 위한 틈새가 보이자마자 준영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다시를 향한 길은 험하기만 했다.


다시 한다라고 했을 때 쉽게 생각한다면 다시 하기를 행하는 그 순간 이후의 행동에 결과가 정해 지므로, 그 순간만이 중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무른 주먹으로 벽을 친다면, 결국 상처 입는 건 자기 자신일 뿐이다. 때문에 준영과 현우는 그 준비를 탄탄히 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는 재심을 제목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에 무게가 실린 것은 재판소가 아닌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그 과정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 놓인 것은 진실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준영은 파산 직전의 변호사였고, 현우는 빚더미를 안게 된 젊은 날을 빼앗긴 청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돌벽에 투박하게 분필 몇 개로 그려낸 사건의 개요도는 그 어떤 첨단장비의 그것보다 강한 힘을 가진 듯 보였고, 그들은 진실이 가져다주는 힘을 통해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 현우의 집은 바로 갯벌을 사이에 두고 바다 옆에 있었다. 보통의 시선이라면 광활한 바다가 주는 탁 트인 시야에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릴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바다는 그러지 않았다. 현우의 아버지를 앗아간 것도 바다였고, 잘 보지 않는 눈으로 갯벌에서 시장에 내다 팔 해산물들을 더듬거리는 현우의 어머니의 모습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죽지 못해 사는 듯이 보였다. 야속한 파도만이 거리를 재며 언제라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으로만 보였다.


이렇듯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 경계선을 두고 한쪽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다. 어느 하나 멀리 있지 않고, 코앞에서 우리를 향해 언제든 덮쳐 올 수 있다. 현실이란 것이 가혹하게 끝까지 내몰아 죽음을 코앞에서 마주했을 때에는, 자신의 삶이 멀어진 만큼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해버리곤 한다. 그것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바다를 향해 절규한 현우의 모습 속에서,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유이다.  


때문에 사람은 삶으로 되돌아올 줄이 필요하다. 갯벌에 현우가 갯벌에 심어놓은 줄은 그의 어머니를 죽음의 반대편으로 모셔올 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희망이란 이름을 붙여주어,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있다면 죽음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단단히 희망의 끈을 붙잡고 붙잡고 바라본 바다는 밝은 빛을 잔뜩 머금고는 푸른색을 띠며 현우와 준영의 배경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그 법이라는 것이, 진짜로 사람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여?


결국 영화는 하나의 물음을 놓을 뿐이다. '과연 법은 어디에 놓여야 하는가'라는. 영화속에서 법은 분명 보호의 목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약자들을 억지로 가둬놓고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할 뿐이었다. 어느샌가 법은 죄지은 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닌 운이 없는 사람에게만 적용되기 마련이고, 힘 있는 사람들의 입김에 이리저리 뒤집히는 모습이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따질 필요 없이 그것은 사회의 어느 부분을 아주 세차게 꼬집고 있었다. 


정의(正義)라는 것은 위쪽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꼭대기에 있는 몇몇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맨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정된 시선에서만 완성된 정의는 분명 무너지기 마련이다. 영화에서는 거짓된 정의를 무너뜨리는데 진실이라는 힘이 있었고, 이것은 단지 영화 속에서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내보인 진실을 찾고자 하는 목소리는 분명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역사책의 한 페이지가 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준영의 입을 통해 전해진 '변호사법 1조 1항'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변호사뿐만이 아닌 우리 인간이라면 충실히 가져야 할 덕목이다. 영화 속 준영의 모습은 단순히 변호를 위한 것이 아닌, 현우라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냈다. 결국 그가 쫓고 있었던 것은 돈도 명예도 이미지도 아닌 바로 의뢰인의 잃어버렸던 미소였을 뿐이었다.


다시의 과정에서 되찾은 현우의 세상을 향해 닫아버린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시간 10년에 대한 것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갚아낼 수 없었다. 그 소년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진심어린 사과밖에 없었다. 법이 정의가 그리고 사람이 약자의 편에 설 수 있었을 때, 본의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우리의 시선 사각지대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욕심이 만들어낸 거짓에 치여, 삶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진실을 원하고 그것이 목소리가 되어 세상의 변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때, 현우에게 말뿐인 사과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뀐 세상에선 '다시'라는 것은 고통의 무게가 아닌 희망의 무게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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