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호정 Dec 26. 2017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한 인간으로서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을 보고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백색광(白色光)


 누군가 나에게 '죽음'을 다른 한 단어로 묘사하라고 한다면, 나는 '백색광'이라고 할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마주했을 때, 여릿해지는 그 기분. 눈꺼풀을 아무리 굳게 닫아도, 사이사이 새어 들어오는 빛 가시가 머릿속을 난자하는 그 빛을. 죽음의 색이 왜 흰색이냐고 묻는다면, 땅에 두고 사라져 가는 부유하는 영혼의 느낌이 내겐 결코 어둠이 아니다. 어쩌면 그 단어가 개인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고, 그렇게 나아가고 싶은 백색광의 죽음이 삶의 종착역이고 싶은 그런 마음.


 시간이란 긴 물리적 배경에 한 번의 흠집에 지나지 않을 그런 것이 인생이겠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면서 서로의 삶에 무게와 깊이를 담아내고 죽음이란 끝을 단절이 아닌 기억으로 남게 한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죽음의 연장선 위에 놓여 시간을 이어가다가, 언젠간 우리의 것도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것은 막을 수 없다. 인간은 불가항력에 대해서 무력하다. 시간, 죽음, 그리고 감정.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평생 동안 답을 찾으려 하지만, 끝끝내 그것은 답을 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두려움을 미학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꽤 위로가 된다. 김용화 감독의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도 이에 해당된다. 익숙하다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죽음'과 한국 고유의 '저승사자'를 통해 한 남자의 죽음으로 다시금 삶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양보가 없다. 때문에 삶의 단절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김자홍(차태현 분)에게도 그러했다. 3자의 눈이 되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본 그의 시선은, 단순한 연민이나 후회나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불신(不信)'이었다.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숨이 끊어져버린다. 이 불변의 법칙 안에서 우리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끝이 죽음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준다.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온 평생을 다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정말이지 불행히도 시간이란 것은 단방향이다. 언제나 한쪽으로만 흐르며,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때문에 후회와 같은 흘러간 시간에 여과되지 않는 감정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감정에 또한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덜어내지 못한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응고되어 무겁게 삶을 끌어내리려 하더라도, 애석하게도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다행히도 인간에게 무기를 주었다. 그것은 '양심'이었다.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선(善)'이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끊임없는 유혹들이 우리의 삶 도처에 놓여있고 그것은 후회의 시작점으로 작용되곤 한다.



 영화는 천륜, 살해,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이 7가지의 죄목을 제시한다. 이 중에는 분명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인 '법'으로 제제하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들 외에 단순한 죄책감으로만 끝나는 몇 가지의 죄목이 있다. 그것들은 양심을 지나쳐 간다면 죽음을 맞이 할 때까지도 그 누구도 문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심판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를.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들 말한다.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영화는 그것의 바람을 이뤄지듯이, 하늘이 아닌 지옥에서 벌을 내려준다.


 인간됨을 외면하고 자신의 발가락 끝에만 시선을 두어, 스스로가 세상에 떳떳하게 제대로 서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그 사람이 사실은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지옥으로 묘사되는 죗값을 치르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끔찍하다. 그것들이 바로 현세에서 자신이 타인에게 지은 죄가 상대방에게 어떠한 느낌이었을지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본인의 의사가 어떻든 해당되는 죄는 고의와 우연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삶을 살면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순간의 감정에 의한 고의였든 의도치 않았던 실수였든 어느 순간 삶에 하나의 결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답을 하나 알려준다.


저승 법 1조 1항,
이승에서 이미 진심으로 용서받은 내용은 저승에서 다루지 않는다.


 아주 자비로울 수 있는 이 법안은, 결코 순한 법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강력하고도 무거운 법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아직 여기 현세에서 살아,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언제든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책임을 떠안고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건네고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한다는 과정은, 저승 법 1조 1항에 놓을 만큼 죽음을 준비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상상이겠지만, 또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다.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은 죽음을 통해서 다시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가 내세운 키워드인 '용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 그리고 용서를 하는 일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영화가 보여준 세계 속에서의 '죄'는 재판을 받기 위한 소재로 쓰였지만, 분명히 여기 현실에선 무게를 갖고 우리가 인간의 형체를 갖고 있는 한 인간됨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결국 영화는 우리가 인생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한 인간으로서 꽤 무거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직 우리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철비, 그 무거운 날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