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보고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하였습니다.
시대는 몇 번이고 빛을 잃어 왔다. 문명의 시작으로 첫 장에 쓰인 역사라는 책을 한 손에 잡아본다면 분명, 금방이고 달아올라 뜨거워서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순한 단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누군가는 단어 하나를 쓰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고, 누군가는 쓰인 단어를 지우기 위해 어느 한구석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들은 영웅 어쩌면 악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별명이 붙여지는 것은 잉크가 다 마르고 다시 읽히고 읽힌 뒤에야 이루어진다.
영국의 정치인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또한 자신의 한평생을 바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전쟁을 종식시킨 영웅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물론 먼 훗날이었다. 당시의 그는 수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매일매일을 단두대에 오르는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칭해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옅은 술기운과 가벼운 유머 그리고 강한 신념을 가진 그가 있었다.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에서는 이러한 '윈스턴 처칠'의 모습이 드러나있다.
'윈스턴 처칠(게리 올드만 분)', 그는 한 명의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정치인이라는 속성은 그 사람을 단 '한 명'으로만 두지 않는다. 색을 입히고, 자리를 정하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소속의 의견을 전한다. 서로의 위치에서 다른 쪽 사람들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하지만 그런 좋은 겉포장 안에는 수많은 검은 속내가 담겨있기도 한다. 자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정을 정하는, 오랫동안 만들어온 정치 체계에 고착화된 부작용이 1940년대 영국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정당의 뒤에 놓지 않았다. 그가 정치에서 힘을 쏟은 것은 언제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순전히 '나랏일'뿐이었다. 더군다나 전쟁이라는 민감한 상황에서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때문에 그가 입에서 물어뜯기 좋은 아주 단내 나는 말을 꺼내도록 그들은 바라고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신념으로 올곧게 세운 굳센 목소리였다.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
그는 전시 수장 취임 연설에서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물론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을 본다면, 분명 단호함을 보이는 명연설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고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망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씩 무너저가는 서유럽의 마지막 땅에서 몰려오는 불바다를 코앞에 두고 타협보단 싸움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분명 정치에 있어서 불리해질 수 있지만, 처칠은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내세웠다. 그것은 그가 어느 정당의 누군가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윈스턴 처칠'이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얘기를 하자면, 연출에서 '빛' 아니, 어쩌면 '어둠'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었다. 빛과 그림자라는 상반되지만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양분할 수 없는 그 두 가지의 요소가 영화에서 잘 녹아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의 시간은 극한의 어둠이었다. 때문에 영화는 처음부터 끝가지 빛을 거부했다. 그것은 곧 그림자로 영화가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처칠의 목소리를 필요로 했고 그것이 더욱 빛을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묘한 울림이 그의 목소리에 있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의 모습을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무성의 장면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것이 당시 처칠이 바라본 영국이 갖고 있는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망상꾼이란 것이 그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수식어를 의심하기보단, 자기 자신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두운 시대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며 오지 않을 빛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단, 그림자에 몸을 숨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혹자들의 태도에 그 또한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가 마주한 사람들은 바로 어느 소속의 무슨 직책의 누군가가 아닌, 한 명 한 명의 국민이었다. 그 길로 그는 온전한 영국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의 대상을 다시금 철저히 확인했다. 무자비한 독재자에게 온전히 힘을 쏟을 수 있도록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역사가 되었다.
'난세에 영웅은 등장한다.'라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윈스턴 처칠', 그의 신념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정치 위에서 '자기 자신'을 굳건히 지켜낸 것과 목소리를 들어야 할 곳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치인의 모습이다. 그렇게 그의 목소리가 문자가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힘들게 다음장으로 넘어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 그리고 우리 앞에도 앞으로 쓰일 많은 빈 페이지의 역사책이 놓여있다. 아무리 순한 말로 단어를 이어나가도, 누군가는 피를 흘릴 것이며 누군가는 비통한 울음으로 다음 단어를 대신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윈스턴 처칠을 필요로 할 것이며, 그러한 정치인들로 채워진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