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립 투 스페인'을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지가 주는 풍경은 오히려 개인을 격리시킨다. 일상이란 범주에서 벗어난 주변의 풍경이 낯설게 시각을 지배하고,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고무시켜 익숙함에 취해있던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여행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여행을 영화로 풀어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이 그것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벌써 세 번째의 만남을 가져왔다. 다큐멘터리로 꾸준하게 경력을 쌓아온 그의 입맛에 맞게 여행을 영화라는 매체로 알맞게 풀어냈다. 벌써 세 번째 시리즈인 트립 투 스페인은, 스페인의 절경과 두 주인공의 유머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이란 존재를 놓으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떠나고 보고 먹고 얘기를 나눈다. 그렇기에 정말 여행에 온 것처럼 부담 없이 편하다. 음식에 곁들여진 유머는 여행에 풍미를 더한다. '로리 리'의 여행기를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여행길은 참으로 유쾌하다. 두 주인공 스티브 쿠간과 롭 브라이든은 주변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유머에 충실이 자신들을 맡긴다. 영화의 재미는 그곳에서 나온다. 서로의 대화의 소재인 여러 배우들이나 문화나 영화나 음악 등등 여러 가지 요소들은 대사뿐이지만 철저한 묘사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장면을 이어나간다.
그들의 여행은 '돈키호테'를 똑 닮아 있었다. 돈키호테가 담고 있는 유머와 냉소가 딱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양상이었다. 미겔 데 세르반데스가 50대의 나이에 썼던 돈키호테처럼 그들의 나이도 50대였다. 현실에 충실하여 열정이 식었을까 싶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도전하고 나아가고 있었다. 때문에 여행에 마찰이 생긴다. 일상에서 멀리 탈출을 감행한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행이 무서운 이유는 한 가지 또 있다. 바로 끝이 있다는 것.
일상으로의 회귀는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스티브처럼 여행을 떠나오던 중에 일상이 삐딱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더더욱 최악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운 공기는 그들에게 신선함을 불어넣어주었다. 여행은 그렇게 끝을 정해놓은 채 새로운 장면으로 길을 이어간다. 때문에 여행길에 우리는 일상 속에서는 하지 않은 다른 선택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새로운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다양한 길을 발견한다. 여행의 묘미는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변수이다. 그것을 마냥 즐기기란 쉽지 않다. 기대했던 명소가 마침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뒷골목 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한다. 계획을 온전히 실행한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만큼 더 재밌기도 하다. 삶도 그러하다. 죽음이란 끝이 정해져 있고, 많은 변수가 있다. 계획대로 인생이 흘러가지도 않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끊임없이 우리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만든다. 앞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장의 두려움이겠지만, 덕분에 삶은 다채로워질 수 있다.
둘의 여행은 그렇게 흘러간다. 유머와 냉소 그리고 크고 작은 변화들. 대화 속에서 그들은 과거를 추억하면서 미래를 그려나간다. 인생의 어느 한 점을 길게 늘어놓았을 뿐이었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을 보는 듯했다. 여행은 그렇게 삶과 닮아있다. 미래라는 타지로 떠나고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만난다. 계획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아간다는 보장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스티브가 잔뜩 고민을 떠안고 맞닥뜨린 상황은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다음 장면에서 스티브는 무사히 인생을 즐기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들의 여행은 흘러가고 우리의 인생도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