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목소녀'를 보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다섯 돌이다. 일렬로 다섯 돌을 놓게 되면 승리하게 되는 '오목(五目)'. 한 손에 꼭 맞는 그 다섯이라는 숫자가 교차된 19줄 위에서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간단해 보이는 규칙 속에서 그 숫자를 이루는 과정은 꽤나 험난하다. 돌 하나를 놓더라도 주변을 잘 봐야 하고, 두 개를 잇다가도 이 길이 맞나 싶다. 세 개를 이어서야 확신이 들다가도, 네 개까지 만들어놓고 벽에 막혀버린다. 조금 여유라도 부릴까 싶어 이런저런 돌을 놓다 보면, 어느새 패배라는 타이틀만이 덩그러니 남겨져있을 뿐이다.
언제나 들어도 익숙지 않은 단어였다. 불행히도, 이 사회가 경쟁 사회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한 '패배'라는 사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정신없이 달리다 넘어졌을 때 보이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골인 지점보다, 한계라는 돌부리와 무릎 위 뼈아픈 상처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돌 네 개를 놓고도 승리하지 못하는 그 아쉬움의 누적은, 첫 돌조차 차마 놓지 못하게 만든다. 패배의 트라우마. 그것은 그렇게 찾아온다. 거대한 사건이나 깊은 좌절감 없이도, 작은 실패가 고여 어느새 무겁게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한다. 그렇게 한 소녀도 과거 자신의 돌을 잃었다.
바둑 신동으로 태어나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자란 나는, 그 기대만큼 늘 이기고 또 이겨야만 했다.
그것이 이 사회의 생존 방법이었다. 이기고 또 이기는 것. 승리를 강요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상이다.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제목의 영화가 30주년을 1년 남긴 이 시점에서, 세상은 자로 그은 듯 벗어나지 않은 부끄러운 연장선을 잇고 있다. 자연스럽게 승자와 낙오자가 생기고, 성공과 실패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곤 한다. 이런 세상에서 '이바 둑(박세완 분)'은 완벽한 패배자였다.
세상이 보내던 박수는 어느새 손가락질이 되었다. 패배라는 단어가 그녀의 이름 옆에 적힐 때마다, 죄목이 하나씩 늘어나듯 그녀의 고개는 점점 무거워졌다. 돌을 놓자 그녀는 이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던져졌다. 무방비한 세상 속에서 시간은 여전히 뚜벅뚜벅 걸어나갈 뿐이었다. 때문에 억지로 등을 떠밀린 그녀는 기원의 아르바이트생이라는, 현실과 꿈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자리했다. 어릴 적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지금은 역광만을 남겨, 그림자 속에 그녀를 가둘 뿐이었다.
꿈이 지나간 발자국은 참으로 깊다. 열심히 꿈의 뒤꽁무니를 쫓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마주한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 한때 가슴을 불태웠던 꿈이란 단어는, 풍화되지 않는 과거 속 유물처럼 그대로 놓여있다. 바래진 현실의 색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꿈이지만, 다시 꿈을 부여잡기엔 두 손이 너무도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이바둑도 그러했다. 때문에 또 다른 도전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이 된통 깨지고 그러거든요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시큰둥한 표정과, 바둑돌의 익숙한 무게에서 느껴지는 그날의 트라우마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어느 현실이 막아선 벽이 아닌 그동안 그녀가 쌓아 올린 벽. 결이 달랐다. 그동안 그녀는 '바둑'이란 이름 안에서만 살아왔기에, 자신의 경계 밖 세상에 대해선 욕심도 설렘도 없었다. 그녀의 오목을 향한 첫발은 이렇게 시작했다. 의미도 역사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은 각자의 경계를 갖고 살아간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본인 스스로가 한계를 정해 놓는다. 이 한계는 자신의 효율적인 삶을 가능케하지만,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둘 수도 있다. 도전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미 그 단어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도전에 닿지도 못하고 단어들은 그냥 사라지곤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단어들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도전들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놓여있는 것이다. 어떤 일도 더 일어날 수 없는 과거와는 달리, 미래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건조한 발걸음으로 시작한 도전은 성공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주인공 이바 둑은 등 떠밀려 오목에 도전하게 되었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별거 없어'로 시작하니 '할 수 없다'로 이어졌다. 그녀가 좌절 이후에 다시 일어나, '해보자'로 다시 시작하자 마침내 '할 수 있다'가 되었다. 그렇게 향한 오목 대회장에서 그녀는 또 한 번 벽을 마주했다.
아직도 악수로 보여?
돌을 두었다. 그것은 불리한 상황에서의 악수였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악수를 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바둑으로 태어나 바둑을 그만두었다. 좌절하고 도망쳤다. 결국 이곳에 와서도 또다시 악수를 만났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했다. 또 누군가는 혀를 찼다. 그럼에도 그녀는 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놓다가 보니, 어느새 네 번째 돌에 다다랐다. 그러자 그녀가 한마디를 한다.
아직도 악수로 보여?
그녀는 그제야 마지막 다섯 번째 돌을 놓았다. 각각의 돌들은 그동안 악수로 여겨진 돌이었다. 좌절 끝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던 덩어리들이 하나하나 모여 마침내 오목을 이루어냈다. 그동안의 괴로움에 뒤척였던 몸짓은 하나의 춤 선이 되어있었고, 고민에 내질렀던 절규는 어느새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괴롭고 힘들었을 과거의 그녀에게 부드럽게 한 마디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짧은 한 줌 숨으로도 말할 수 있는, '괜찮다'라고.
이름이 이바둑이지만 오목을 두어도 괜찮다. 몇번이고 악수를 두어도 괜찮다. 져도 괜찮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무너져도 다 괜찮다. 지금 자신이 악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냥 괜찮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지독한 악수를 두었더라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득 꿈꾼 채 한발 한발 천천히 나아간다면, 어느새 마지막 돌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을 것이라고. 정말 다 괜찮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