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튼튼이의 모험'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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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누구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릴 적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꿈을 말했다. 표정은 하늘을 닮아 맑았고, 눈은 별을 닮아 빛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작은 꿈은 몸을 부풀려 세상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먼 곳에서부터 품어온 꿈을 자신의 눈앞에 가져왔을 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다시 지금 소년은 꿈을 말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던 그 꿈을. 불행히도 꿈이 세상에 내뱉어진 순간 손가락질당하고 비웃음 당했다. 순수함은 철없을 적 세상 물정 모를 적의 꿈이 돼버렸다.
꿈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사는 이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어쩌면 영영 꿈이 꿈으로만 남을까 두렵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이 향한 곳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마치 평생을 다해도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쫓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 두려움보다도 한 발자국 앞서가며 또 하루를 살아가는 소년이 있다. 영화 <튼튼이의 모험>의 충길(김충길 분)은 레슬러를 꿈꾸는 고등학생이다. 레슬링을 향한 사랑을 수줍게 고백해보지만, 그에겐 '기술이나 배워라', '돈이나 벌어라'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렇지만 충길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우상의 사진 앞에서 크게 한번 기합을 외치며 떨쳐내며 또 한 발짝 나아간다.
싸이야!
달리고 또 달렸다. 소년은 그렇게 늘 같은 곳을 또 달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디론가 향해있었다. 더 먼 곳을 향해, 그리고 더 빛나는 곳을 향해. 거창하다면 거창한 꿈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다 걸어냈기에, 결코 가벼운 소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무거운 타이어는 그의 발목을 더욱 튼튼하게 해줄 뿐이었다. '싸이야!'하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텅 빈 체육관을 울릴 뿐이었지만, 그 가운데 곧은 심지만은 굳게 불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말이 있다. 충길은 문장 속 준비된 자에 꼭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고 준비했다. 덕분에 그가 맞이한 기회는 참으로 달콤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불행히도 저 문장 속에는 함정이 담겨있다. 아무리 준비를 해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기회를 마주하기 전까진 자신이 준비한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은 했던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할 뿐이다.
사실 좌절은 완벽이란 단어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완벽이란 선의 붕괴는 곧 한계로 다가온다. 때문에 '완벽한 준비'란 말은 어쩌면 커다란 도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공했다면 그만큼 뿌듯하겠지만, 만약에 실패했다면 그 씁쓸함은 오래갈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선, 완벽하다란 생각을 지워야 한다. 언제나 완벽함을 경계하고 자신의 부족함에 주목하는 것이,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준비하다란 것은 이렇게 완벽함을 향해있기보단, 그것을 경계할 때 확실해질 수 있다. 충길은 자신의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서 매일매일을 나아갔다.
네가 뭔 상관이야!
진권(백승환 분)은 혼혈인이다. 필리핀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진권의 소원은, 어머니를 다시 필리핀에 보내주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향한 곳은 공사판이었다. 그곳에서 달아올랐던 꿈을 삭히며 착실하다면 착실히 자신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다만, 자신에 대한 욕심보다도 타인에 대한 욕심이었다. 자신의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바람이었기에, 자신의 꿈을 스스로 과감히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얽매인 삶이 그의 것이었다. 결코 세상에 본인 스스로만을 두지 않았다. 당연하게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지만, 자신의 삶을 타인이 살아가는 것 또한 아니다. 이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전제조건이지만, 쉽게 간과하곤 한다. 진권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고물상 아저씨를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한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은 각자의 관계에서 분명 분리되어 있지만, 쉽게 하나의 관계 선의 양방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있어서 결코 소속이 아니다. 서로가 교감에 의한 정신적인 결속을 권리나 의무라 착각하는 순간, 둘의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타인을 타인으로 두는 것. 진권은 그 가운데 이해와 공감으로 타인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진권은 고물상 아저씨와 어머니의 대화를 벽 뒤에서 묵묵히 듣는다. 그곳에서 찾은 것은 분노나 불쾌함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볍지만 진솔한 대화였다. 동생의 말이 귀에 울렸을 것이다. '네가 뭔 상관인데!' 그 말 한마디를 그는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상관이 없었기에 그랬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대로 진권은 진권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애정은 남아있었다. 때문엔 진권은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타인을 타인으로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시 진권은 체육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전남에 있는 함평골프고 레슬링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특유의 자연스러운 연출과 이러한 배경 이야기 덕분에 영화는 한없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거기에 영화는 실패나 좌절을 더해 이야기를 현실 언저리까지 꺼내 놓는다. 그렇기에 이들의 고군분투는 더욱 와 닿는다. 튼튼이라는 이름은 정말 튼튼했다면 지어지지 않는 예명이다. 그 이름에는 튼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욱 담겨있다. 사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Loser's Adventure'이다. 말 그대로 패배자들의 모험기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그들이 결국 승리자로 거듭나겠지만, 이 영화는 과감히 그것을 과감히 거부한다.
누군가의 성공담만이 자극이나 모티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내내 바닥을 허우적댔지만, 분명 자신의 길을 나아갈 때 그들은 빛이 났다. 그들의 발화(發火)는 따스하고 밝았다. 물론 분명 후회스럽기도 아쉬움도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어떤 초인도, 영웅도 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 명의 인간으로 남았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부딪히고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서고. 다시 그들은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누군가는 다시 공사장에, 버스 운전석에, 골방 만화책 더미 속에 그렇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허무하지만은 않다. 쥐 죽은듯한 눈으로 살아가던 그들 눈에 빛이 빛났고, 해보자고 다짐했던 그들의 모습은 언젠가 또다시 그들을 찾아올 것만 같다.
영화는 도전 보여준다. 그 끝이 실패할 수 있다고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도전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은 결코 들지 않을 것이다. 삶과 맞닿은 바로 그곳에서 영화는 위로와 응원을 건네준다. 붉게 타올랐던 심지가 꺼진 후에 남은 것은 재가 아니라, 언제든 또 타오를 수 있는 다음 심지였다. 튼튼이들의 그리고 우리들의 삶은 아직 끝이 아니고 언제든 또다시 타오를 수 있다. 그렇기에 충길은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처음에 외쳤던 기합으로 똑같이 외친다.
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