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피터스 문'을 보고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 앞에서 목도한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현실의 벽이 한 꺼풀 벗겨지는 순간에 놓여있었다. 그 탈피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경외심, 어쩌면 환희와 행복. 어떠한 단어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감정이 눈앞의 현상과 함께 머릿속을 뒤섞었다. 누군가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또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았고, 어떤 누군가는 돈을 내밀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기적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며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텼다.
이러한 기적 한가운데 서있는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주피터스 문'에는 기적을 행하는 한 남자와, 그를 만나게 된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갖고 있는 다양한 시선을 영화 속에 담아냈다. 태생적인 고통과 초인적인 힘의 조합은 꼭 히어로물에나 어울릴법한 설정이지만, 각 단어가 난민과 기적을 뜻하게 되었을 때 이 조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리아 난민 아리안(좀보르 예게르 분)에게 붙은 별명은 다름 아닌 천사였다. 그는 화려한 날개도 뚜렷한 후광도 없었다. 다만,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 하나만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는 천사가 될 수 있었다. 눈 앞에 마주한 현실을 그렇게 사람들은 참으로 비현실적인 단어로 납득했다. 그렇게 해서만이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함이 앞섰다기보단 인간의 무력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인간은 무력했다. 기적 앞에서 그들은 한없이 무너져갔다. 두려움이 자라났을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에 그들이 찾은 것은 '천사'라는 신앙심과 선함만이 가득한 단어였다. 사실 인간이 어떤 현상을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현상을 부정하면서 의심하거나, 긍정하면서 깊게 해석하거나. 하지만, 그들은 부정하지도 깊게 해석하지도 않았다. 단지 가장 단순한 환상으로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환상은 강하다. 존재하지 않기에 반대로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환상을 대입한다면, 오히려 이야기는 쉬워진다. 의외로 인간은 환상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환상들이 힘입어 역사를 이어왔다고 할 수도 있다. 환상이 누적되어 신뢰와 신념을 입었을 때, 사상이되기도 종교가 되기도 하다. 그들에게 아리안은 새로운 환상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때문에 천사라고 불리는 그는 게보르 스턴(메랍 니니트쩨 분)에 의해 단순히 돈으로 환산될 뿐이었다. 둘은 서로 이해관계에 뒤섞일 뿐이었다. 아리안은 아버지를 찾고 싶어 했고, 스턴은 그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서로는 서로가 필요했지만, 이것은 순전히 물리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뿐이다. 서로는 등을 마주하고 각자 다른 곳을 보며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해지기 위한 지지가 아니라 불안하게 서로에게 무게를 지불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이어지곤 한다. 각자의 필요에 의한 방향이 자신으로만 향해있을 때, 그 관계는 흔히 말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된다. 이런 관계는 금방이고 무너질 수 있다. 물론 이런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더 나아갈 수 있을 때 서로는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리안과 스턴의 관계는 나아가지 못했다.
때론 이러한 관계를 한 번씩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아리안이 스턴에게 이용당하면서 자각하지 못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서로의 감정의 무게는 다를 순 있어도, 마음의 방향까지 달라선 안된다. 그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리안이 스턴의 품을 벗어났다가 다시 만났을 때, 스턴은 마음의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강한 결속력을 갖고 관계가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천사로 불렸다. 영화는 더욱 극한으로 주인공을 몰아간다. 사실 그가 겪은 극한의 상황은, 그들의 입장에 놓인다면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현실을 담아낸다. 영화가 판타지 장르를 내세웠다고 해도, 결코 현실과 분리시킬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을 두고, 각자의 인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영웅이 탄생했다. 아리안의 공중 부양은, 흘러가는 기류에 그대로 몸을 싣고 부유하듯 떠올랐다.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항상 그 흐름이 올바른 곳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땅 위를 보고 있을 뿐이다. 공기의 흐름은 바람이 되고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지만, 땅 위의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리안은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의 머릿속 가두어놓았던 세상이 깨어지도록 만들었다. 우리 또한 한 번쯤 세상의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의 발걸음이 어디로 나아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기적은 찾아온다. 할 수 없는 일은 기적이 되어 일어나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사상과 체계는 곧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만 끝날 수가 없다. 현실적인 이야기나 장면으로 잔뜩 우리를 스크린 밖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몽환적인 장면을 통해 환상을 꿈꾸게 만든다. 때문에 영화는 잔인하게도 다시금 스스로 거짓이었다고 고백하게 만들고, 관객을 여린 죄책감에 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아직 어디론가 흐르고 있고, 아리안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직 숫자를 세며 눈을 감고 있는 소년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