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랑'을 보고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분노는 쉽게 표출된다. 더욱이 그 뒷면에 사회를 놓았을 때 더욱 그렇다. 삶을 채워가다 보면 부족함은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다. 갈증이 생기지만 쉽게 해소할 수가 없다. 때문에 누적된 갈증은 마음 한구석에 구멍을 낸다. 그 구멍에선 방향성을 잃고 사방으로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지만, 그것이 빛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감정은 분노라는 이름으로 마음 한 구석에서 시작되어 사방으로 공격한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있었다. '인랑'이라는 이름으로. 달빛이 내려앉을 때 어둠 속엔 분노로 가득 찬 붉은 눈만을 남긴 그 남자가. 김지운 감독의 영화 <인랑>에서는, 이렇게 분노가 가득 찬 세상 속에서의 한 남자를 그려낸다. 남북한 정부가 통일계획을 선포한 뒤, 혼란의 시대에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와 섹트에 대항하는 경찰 조직 '특기대', 그리고 정보기관 '공안부'사이의 권력 싸움이 배경이 된다. 그 가운데 특기대의 일원인 임중경(강동원 분)의 이야기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에서의 선과 악은 매우 모호한 입장을 보인다. 보통의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선의 속성을 부여하고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주인공에게 물리적인 약함을 부여하고 극복하게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주인공 임중경 뿐만 아니라 영화의 등장인물 모두 먼지 투성이었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을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는 발 한쪽에 족쇄 하나씩을 차고 있다. 때문에 영화는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모호하게 만든 선과 악의 구조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하고.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분명히 있었다. 여기서 영화는 선과 악은 옳고 그름과 전혀 다른 속성임을 말해준다. 권선징악이라는 옛 지켜온 스토리의 정형을 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선과 악이 모호해졌다고 해서, 거대한 붕괴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옳음을 따라야 한다는 법칙만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캐릭터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하기보단,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는를 확실히 이야기한다. 두 종류의 개념을 분리하기 위해서 줄곧 악의 요소들이 반전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인물들 간의 이해관계는 복잡해지고 오해와 갈등이 전개된다. 그래도 이야기가 결말로 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체계의 붕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큰 방향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체계의 붕괴를 표현해 낸다. 주인공이 영웅이 되는 과정이 주가 아니라, 무너질 대상의 입장에서 철저히 묘사된다. 이는 전투씬에서 잘 드러나는데, 주인공의 관점이 아니라 적의 관점에서 그들이 인랑을 마주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이 이야기가 극복의 이야기라기보단 체계의 붕괴가 가까운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극복과 붕괴가 한 흐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붕괴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체계의 붕괴는 어쩌면 불안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 변할수록, 체계를 먼저 확립시켜야만 과도기 사이의 성장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떻게 체계가 유지해올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어, 붕괴가 혼돈의 시작보다는 탈피의 과정임을 알려준다. N극이 없으면 S극도 없는 것처럼, 권력관계 사이의 체계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에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힘쓸 대상이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작용 반작용 원리에 따라서,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체계를 고착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해 보이던 힘의 균형 논리가 다시 생각해보면 사회가 발전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 고민을 하기 위해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분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체계, 정부, 북한, 반정부 단체, 경찰 등등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영화는 어둡고 무겁다. 그 가운데 질문은 돌고 돌아 다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묻는다. 어느 것도 답이 될 수 있기에, 그만큼 고민하고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라는 속성의 속도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멀리 시선을 두지 못하고 눈 앞에 놓인 것으로 바로 꽂히곤 한다.
세상은 숫자와 언어로 표현되고, 이것들은 쉽게 속일 수 있다. 권력은 꼬리를 쉽게 자르고 힘을 유지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분노를 쏟아야 하는 대상들은 본질을 흐리게 하고 몸을 숨긴다. 물론 몇 번이고 되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결코 멈춰 선 안된다. 의심을 멈추는 순간, 분노는 결국 컨설적이지 못하고 파괴만이 남는다.
분노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분노는 흐름에 편승된다. 누군가 달콤한 언변으로 주도한다면 분노의 감정은 쉽게 따라가곤 한다. 이용당하는 분노이기에, 그 끝은 매듭지어질 수 없다. 결실 없는 분노는 한없이 소모적일 뿐이다. 그렇기에 임중경은 자신의 길을 나아가려 했다. 마지막 그가 도달한 분노의 끝은 물리적인 제압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며 과거를 바로잡길 원하던 마음에 있었다. 마지막 총구에서 뿜은 총알 한 발은, 임중경의 끝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렇게 나아간다. 분노를 품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올바른 대상을 찾아 감정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는 마지막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라는 문구로 끝이 난다. 지나온 과거를 바꿀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녕 옳았는지, 그리고 다른 선택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바뀌었을 미래를 고민하고 기억하는 과정 끝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중경이 상상한 과거는 그의 길을 다잡게 하고, 새로 기억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미래가 어떨지,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과거에 놓여있다.
2018.07.25 개봉 | 139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김지운
(주연)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김무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