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핸드폰을 켜고 오늘 하루를 기록하려 했다. 낯설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썼던 일기를 그대로 작은 핸드폰 위로 옮겼을 뿐이었다.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침에 버스를 놓쳐 수업에 늦고, 급하게 버스에서 내리다가 이어폰을 잃어버리고, 받은 시험 점수는 최악이었다. 마침내 피곤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차 우산을 학교에 놓고 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창밖의 우중충한 하루와 걸맞은 짙푸른 기분이었지만, 엉망인 기분을 그대로 남기고 싶진 않았다.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하나 꺼내고, 평소 좋아하던 영화를 하나 틀어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사진을 찍어 스마일 표시 하나를 덩그러니 남긴 뒤에야 그것이 오늘의 기록이라 할 수 있었다.
진실도 거짓도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소셜미디어가 점차 가벼워지는 만큼, 소모성도 강해졌다. 손에 꼽았던 소셜 미디어의 환경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가 되어버렸고, 덕분에 많은 것들을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시 샤간티' 감독의 영화 '서치'에서는 이러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딸 마고(미셸 라 분)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 데이비드(존 조 분)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터넷이 갖고 있는 속성들을 다룬다. 처음에 인터넷은 그의 추억 창고였다.
기록은 사실 선택적이다. 특히나 접근성이 좋고 편리한 인터넷이라면 더욱 그렇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던 인터넷이란 환경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부피를 키워갔다. 그 모든 정보가 적혀있다고 해서 모든 게 진실은 아니며, 적히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또한 아니다. 이것들의 진위를 판가름하는데 드는 에너지 소모는 매우 비효율적이기에, 사람들은 정보가 적혀 있다는 것 자체에 반응한다. 덕분에 인터넷이란 공간은 점점 무게가 가벼워지고 넓어지고 깊이는 얕아졌다.
거꾸로 살펴보면, 그만큼 우리 또한 인터넷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물론 다른 정보들과 마찬가지로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정보의 주체가 되므로, 그 어떠한 것이라도 경계심 없이 기록할 수 있다. 그렇게 기록해온 자신의 역사 앞에서 진짜 자신을 묻는다면, 어디까지가 자신의 대답으로 할 수 있을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누적된 자신의 기록 안에서 '나'는 점점 흐려지곤 한다. 그렇게 위기는 찾아온다.
영화는 아주 신선한 방법으로 장면을 연출한다. 카메라를 두고 따라가는 것이 아닌, 화면을 놓고 여러 창을 통해서 상황을 보여준다. 때문에 제삼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지켜보는 것' 뿐이다. 때문에 마주하는 온라인의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인터넷을 통해 보는 화면과 다르지 않다. 평소 마주하는 화면과 똑같으면서도,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인터넷 속 문장들은 날이 선 채로 상대방을 기다린다. 그 문장이 쓰일 때의 무게와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풀어놓은 문장 한 줄의 시작은 매우 작은 물결뿐이지만, 그것들이 어느새 파도가 되고 휘몰아치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인터넷이란 공간이 가져다주는 광활함은 경각심을 마비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온라인 상에서의 의식의 수준이 오프라인의 것과는 별개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온라인 문화라는 것이 탄생한 것은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 비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인터넷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 범주를 빠른 속도로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그 색을 살펴보면 결코 맑지 않다. 온라인의 세계는 한 소녀의 안식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잘못 발을 디딘다면 데일 듯한 불바다 또한 그곳에 존재했다. 가감 없이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는 현실보다 가혹했다. 해소되지 않은 괴리는 결국 인간의 범주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형태를 무너뜨리고, 키보드와 다른 표정을 마음껏 지으며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곤 한다
.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묘한 죄책감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최악의 상황들의 연속은 그동안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온라인 문화의 문제들에서 기인하였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직접적으로 일조하지 않았더라도 그동안 문제의식을 크게 느끼지 않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극이 진행할수록 반성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었던 인터넷의 수많은 글들이 영화 속에선 얼마나 건설적이지 못하는지 뼈아프게 느껴지게 한다.
깊은 해구만이 남는다. 고이고 고여 썩어서 악취가 나지만, 인터넷이란 물리적인 범주를 초월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것들을 고쳐야 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억압과 제제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결코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느껴지는 무게 때문에 결코 인터넷을 멀리하거나 온라인 문화를 거부하도록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스크린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하는 영화였던 만큼, 모호해진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에 서서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인터넷은 마고를 구하기 위한 소중한 방법이자 동시에 최악의 방해꾼이었다. 이 정보의 바다에 정해진 주인은 없다. 때문에 누구라도 이 바다의 색을 정할 수 있다. 온갖 날이 선 채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붉은 바다가 될지, 올바른 문화의 형성으로 맑은 바다가 되어 누구라도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푸른 바다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2018.08.29 개봉 | 102분, 12세이상관람가
(감독) 아니시 샤간티
(주연) 존 조, 데브라 메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