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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Aug 31. 2018

집을 탈피한 그녀의 소소한 여행

영화 '소공녀'를 보고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0.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왔다. 거의 쫓기듯 나왔지만, 분명 그녀의 두발로 걸어 나왔다. 나뒹구는 짐덩어리처럼 그렇게 던져졌지만, 갈 곳을 한두 곳 정하고 보니 썩 나쁘지 않은 긴 외출이 될 것만 같았다. 종이 위에 투박하게 적은 옛 친구들의, 아니 지금도 친구라 생각되는 그녀의 사람들의 이름이 곧 그녀의 행선지가 될 것이었다. 앞만 보며 달려왔기에 더 빠르게 과거가 되어버린 듯한, 추억 속에 잔존하는 그들을 다시금 현실로 데려올 터였다. 아무리 그리움으로 꾸며보아도 걸어가는 발자국 위에 흘린 현실의 잔여가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또 누군가를 향해 집을 나선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에서의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담배 한 모금과 위스키 한잔,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적는 가계부는 그녀의 생존신고였으며, 배부른 적 없는 그녀의 계산대에 간신히 채워 넣는 지폐 몇 장은 그녀의 살을 도려내듯 한 장 한 장 아팠다. 더욱이 올라가는 물가 속에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고, 결국 그녀가 포기한 것은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을 잃은 그녀의 직업은 가사도우미였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고 미련 없이 나오는 것이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늘 하루도 누군가의 집을 향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1. 불안과 절박


  불안했다. 그리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을 만난 그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결코 소심하지 않은 고백을 했다. "집 나왔어." 그리고 이어지는 여린 부탁. 계란 한판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부탁 선물이었다. 계란처럼 그녀는 껍질 하나만 벗겨지면 곧 형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부화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단지 그것을 그리고 그녀를 소모품처럼 여기듯이 가차 없었다. 그렇게 건넨 부탁 끝에는 거절도 있었다.


 절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위스키 한잔을 목 뒤로 넘겼다. 혹자들은 손가락질한다. 노력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불안은 곧 절박함과 직결되지 않는다. 한 개인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려 함은, 욕심이 아닌 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손가락질해야 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음이 아닌 포기하는 것이 당연시돼버린 세상이다. 그녀는 당장이고 무너져버릴지언정 자신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말하며 절박함을 거부한다.


 그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어째서인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과 '철이 없다'가 동의문이 돼버린 실상이었다. 그녀가 날리는 세상으로의 일침은 젊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어쩐지 참으로 낯설었다. 마치 그녀의 희끗한 머리카락이 그녀가 젊지 않다고 설득하는 듯했다. 젊음을 체감하기엔 세상은 너무나도 냉혈 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지켜나갔다. 그렇기에 또 한 번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2. 여행


 그녀는 떠나왔다. 어쩌면 지금까지 줄곧 어디 한 곳에 발붙이지 못한 듯하다. 그녀가 찾아간 옛 동료 김록이(최덕문 분)는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그녀에게 억지로 수식어를 붙여주면서 말이다. 사실 어느 것 하나 가지지 못한 것이 그녀였다. 그렇기에 무자비하게 밀려들어오는 그의 말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그것은 분명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닌, 무시와 폭력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라며 단단히 못을 박는다.

 

 그녀에게 내민 결혼이란 단어는 해결책이 아닌 사실 또 하나의 더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녀의 다른 친구들은 결혼을 했다. 그가 안정이라며 내세웠던 결혼을 겪은 이들은 모두 불안을 홀로 곱씹으며 있었지, 해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혼은 인생의 종착지가 결코 되지 못했다. 엉성한 채로 모양을 갖춰서 살아가는 그들의 결혼 생활에 그녀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밥 한 끼였지만, 그 따스함은 그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녀는 또 길을 나선다.


민지 씨가 왜 나한테 미안해요. 난 민지 씨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기뻐요.


#3. 결국은 제자리걸음


 그녀는 낭만 적였다. 친구들을 찾아 하룻밤 담소를 나누고 밥 한 끼를 차려주고, 새로 만난 인연과는 함께 닭백숙을 먹으며 안녕을 고한다. 다만 돈의 색을 입히니 참으로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행 내내 어느 하나 싫은 소리 하지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위스키 한잔으로 하루를 달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소함으로 가득 채운 그녀의 삶은 사치스럽진 않았지만, 충분히 그녀를 빛나게 했다. 


 그녀는 결국 제자리였다. 물가도 오르고 집값도 오르고 담배값도 오르고 결국은 위스키 값까지 오르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여전히 몇 줄짜리 가계부를 투박하게 써 내려가고, 여전히 그녀의 계산대는 가벼웠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나갔지만 결국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몇 번이고 걸어온 이 땅은 굳어져 더욱 단단해졌고, 그녀가 언제든 발돋움할 수 있도록 그녀를 받쳐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 번 어디론가 여행길을 나설 것이었다. 




 그녀가 집을 나온 것은 안식처의 상실이 아닌, 세상으로의 탈피였다. 그녀가 전하는 위로는 바쁘게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음속 깊이 전해진다. 내 집 마련이 궁극의 목표가 돼버린 이 세상에서, 그녀는 과감히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소소함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그녀로 남을 수 있었다. 집이 없어도 된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불안하지만 절박하지 않아도 된다. 제자리를 걸어도 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여전한 낭만을 품고 어딘가에서 또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소공녀 (2017)

Microhabitat


드라마 | 한국


2018.03.22 개봉 | 106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전고운


(주연) 이솜,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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